오늘 설교는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했던 말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가서 싸우러 가자며 소년에게 했던 말입니다. 요나단이 가고자 하는 그곳에는 수 십명, 아니 수 백명의 적군이 있는 곳입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요나단의 이 말 속에서는 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요나단의 이 말에 ‘아멘’이라고 화답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실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요나단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놓여 있다면, 얼마나 요나단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려운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쉬워 보이지만, 내가 직접하려면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나단과 그의 아버지인 사울 왕이 처해 있는 상황은 이랬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사울 왕이 시작한 전쟁은 하나님의 지시로 시작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한 것이지만,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사울에 대한 큰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군대는 전쟁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은 훈련이 안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진 무기도 농기구 뿐이었습니다. 군대의 숫자도 열세였습니다. 그래서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헤아릴 수 없는 적군을 보고, 이스라엘 군대가 공포에 떨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군대로 모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숨거나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온 힘을 다해 싸워도 이길까 말까한 싸움인데, 반드시 지는 전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싸울 사람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정신적인 기둥 같은 사무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울 왕과 요나단이 처해 있는 현실은 처참하고 답답한 일들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울 왕과 요나단에게 남아 있는 순서라고는 이스라엘 전군의 전멸인지도 모릅니다.
그 때 요나단에게 들었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수 십명, 아니 수 백명의 적군 속에 잠입해 들어가겠단느 황당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아무에게도 이 계획은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요나단이 사울 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면 분명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요나단의 말이 맞는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이성적으로, 상황적으로 보면 황당한 계획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의 모습을 보면서 엘리야 생각이 났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가 400명과 아세라 선지자 450명이 대결을 했습니다. 850대 1이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싸움이었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850명이 아니라 1명이 이겼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요나단의 모습에서 또한 골리앗과 싸웠던 다윗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다윗이 자신보다 월등히 탁월했던 골리앗과 싸우려 가면서 했던 말입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 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삼상 17:36-37)’
그리고 이 말처럼 다윗은 물맷돌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워 이겼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보다 한 사람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싸움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전쟁터 같은 이 세상에서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2
블레셋 군대로 향하는 요나단과 그의 무기든 소년이 가려는 그 길은 이런 것입니다.
요나단과 그의 소년이 가려는 그 길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젊음을 낭비할 수 있는 길입니다. 아까운 목숨만 버리는 길입니다. 남들이 무식하다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하는 길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는 일은 어쩌면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를 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간 시간이 밤입니다. 밤은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걳이기도 합니다. 고생 길, 좁은 길, 망하는 길, 십자가의 길을 요나단이 갔던 것입니다.
실제로 요나단이 가야하는 길은 손과 발로 기어서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길을 가려면 필요한 것이 용기와 확신, 그리고 더 큰 믿음입니다.
요나단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요나난은 하나님이 자신을 진짜로 도우시는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요나단은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요나단이 6절에서 자신의 믿음을 말하자 그와 함께 했던 사람이 했던 대답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요나난과 함께 있던 소년이.‘네 말이 맞아. 여호와의 구원은 숫자의 많음과 적음에 달려있지 않아. 그런데 그게 왜 하필 너이어야 하니?’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믿는 것 같지만 믿지 못하는 말이고, 요나단을 주저앉힐 수 있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은 다행히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외롭고 고생스러운 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길을 가려면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믿음의 동지라고 부릅니다. 내가 가진 믿음을 공유하고, 이를 지지해 주고, 그 길을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을 우리는 기꺼이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한 식구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 식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부터 주님의 부활하심을 경험하기 까지 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형제, 자매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좁은 길에 함께 해 주고, 함께 먹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믿음의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지지를 보내주세요. 함께 하겠다고 말해주세요. 네 편이야 라고 말해주세요. 이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좁은 길을 가려는 믿음의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지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요나단처럼 겁없이 힘들더라도 그 험한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를 재차 확인합니다. 바로 블레셋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였습니다. 그들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고, 올라오라고 하면 올라서 그들과 싸우겠다는 계획입니다.
보통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계획대로 되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구원하심이 사람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대로 하나님이 하기 원하시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단과 사울 왕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계획에 하나님이 지지를 보내주시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신의 계획을 언제든지 철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적고 많음에 있지 않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사람이 적을 때 이런 고백을 많이 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적은 숫자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의 자랑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숫자가 적으면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자랑이라고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지금까지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요나단이 배우고 있는 것이며, 우리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3.
요나단은 그를 지지해 준 한 소년의 말과 적군의 말을 통해,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즉 요나단의 내적인 믿음과 적군이라는 외적인 상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요나단처럼, 내적인 확신과 외적인 증거들로 굳건해 지길 바랍니다.
10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요나단은 믿음대로 행했던 사람입니다.
14절입니다. 새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와 함께, 겨릿소 한 쌍이 반나절에 갈아엎을 만한 들판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사람은 스무명 쯤 되었다’
그리고 요나단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첫번째 싸움은 1대 10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일어나는 순간에 블레셋 군인들 사이에 공포가 생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두려움에 임했는데, 때 마침 땅 마저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크난큰 공포가 그들을 휘 감아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끼리 싸우고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밤에 일어난 일이라고, 공포에 휩싸인 블레셋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그런 것입니다. 블레셋 입장에서는 허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자기들끼리 죽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많다고 자랑하던 그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반면 사람이 두 명 뿐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임했던 큰 승리였습니다.
요나단의 믿음이 확증되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나단이 무기를 든 병사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전초 부대로 건너가자.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요나단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시선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를 보는 눈입니다. ‘이래 봐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핏 값으로 사신 바 된 사람이 나라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자녀에게도 심어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교육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가 우리를 보는 눈이 올바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뼈대 있는 집안의 사람이다. 호랑이는 굶어도 풀을 먹지 않는다”. 이런 눈을 가지지고 세상을 이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구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상황 때문에 전혀 기죽을 필요가 없어요.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확신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거면 됩니다.
둘째.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맞다고 무작정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확인의 확인을 거쳐서 일을 추진했습니다.
셋째. 우리의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승리했다면, 우리가 살았다면, 그것이 주님이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숫자가 많아서도 아니고 우리의 열심 때문만도 아닙니다. 요나단이 무찔렀던 적군은 20명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아무리 훈련을 많이 받고, 아무리 최첨단 무기로 무장해도, 하나님이 큰 공포를 보내자 블레셋 사람들은 서로 싸워서 스스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현실이 된 그 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주님을 향한 감사라는 것도 잊이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