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다섯가지 감각이 있습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인데요 그런데 여자들에게는 여섯 번째 감각이 있다고 합니다. 여자의 육감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남편이 바람피우면 아는 감각이라고 ㅎㅎ.
남편들은 바람 피면 안됩니다. 아내 바로 압니다.
어째든, 사람은 다섯 가지 감각 중 한 가지라도 잃게 되면, 살아가는데 참 불편합니다. 다섯 가지 감각 모두,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촉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은 매우 제한된 기관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눈은 보는 기관이지요. 귀는 듣는 기관입니다. 혀는 맛을 보고, 코는 냄새를 맡는 기관입니다. 모두 머리에 있는 기관들입니다. 그러나, 촉각은 온 몸에 퍼져 있는 피부를 통해 느껴는 매우 특별한 감각입니다. ‘차갑다, 따뜻하다, 덥다, 시원하다, 따갑다, 부드럽다, 딱딱하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 와 같은 것들을 우리는 피부를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부 환경을 느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촉각인 셈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촉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서도 촉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사랑하는 연인들은 촉각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고, 사랑을 확인합니다. 손을 잡고, 어깨 동무를 하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는 것은, 우리가 매우 가까운 사이이고, 우리가 지금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표시이지요. 어른들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는 일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보호받고 있다는 메세지를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론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실행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딸의 손을 잡았는데, 너무 어색했다.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는 것 같았다!’ 세월에 쫓겨서 바쁘게 살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딸의 손을 잡는 거싱 낯설었다는 아버지의 솔직한 고백을 들으면서, 저도 그럴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도적으로 아이들의 손을 열심히 잡아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어색하지 않으려고 말이지요.
미국 살다가 몇 년만에 한국에 갔었는데요. 어머니가 오랜만에 만난 저를 보고, 너무나도 반갑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아들! 오랜만이야. 너무 반가워. 우리 악수 한 번 할까!’ ‘예?’ 그렇게 모자가 몇 년 만에 만나 어색하게 악수를 나눴던 일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낯선 남자처럼 느끼셨나 봅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머니랑 안아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는 저를 많이 안아주시고, 엎어도 주셨을 텐데, 제가 자란 후로는 한번도 안아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을 열심히 안아주고, 때로는 장난스럽게 몸싸움도 한곤 합니다. 저도 어머니처럼 아이들에게 그렇게 할까서 그렇습니다. ‘아들, 딸! 너무 반가워. 우리 악수 한 번할까!’ 라고 말할까봐서요.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느냐고. 제가 잠시 생각했었는데, 제 머리에 떠 올랐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가 잘했다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장면’입니다. 대학교에 합격한 것도 기뻤지만, 사실 저는 아버지가 잘 했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셨던 일이 더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머리 쓰다듬어 주는 일은 대단한 일도 아니지요. 그렇지만, 제게는 매우 특별했던 순간이고, 특별했던 경험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장성해진 후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저를 자랑스러워하시면서 만져주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안그러시겠지만, 한국에 있는 저희 가족들은 서로를 만져주는 일에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씩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의지를 가지고 말합니다. 사랑한다고. 아비된 자가 해 주는 별일 아닌 일지만, 제가 압니다. 제 아들도 아비가 머리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늦게 나마, 제가 배우고 있는 것이, 바로 누군가를 만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이, 제게는 어색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지를 가지고, 사람들을 만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악수를 하고, 안기도 합니다. 특히 교회에 오는 아이들을 열심히 안아 줍니다. 제가 꼬마들에게 사정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를 안아주세요’ 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양 팔을 활짝 펼칩니다. 아이들이 제게 오면, 꼬옥 안아줍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메세지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단다’라고 말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자라는 아이들을 만져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져 있습니다. 어른들이 간난 아이를 만져주었을 때와 그렇지 않으면서 차이가 난다는 실험 결과 입니다. 어른들의 손길이 많이 닿는 아이일 수록, 성장도 잘되고, 언어 발달도 잘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간난 아이들은 어른들이 많이 만져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간난 아이가 울면 얼른 가서, 안아줘야 합니다. 그러면 이 일을 통해 아이는,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자기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자기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온 몸으로 깨닫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손을 만져주시고, 잡아 주세요. 그러면 가족간의 사랑이 커져 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 갑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촉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서로를 만져주는 것입니다. ‘손을 잡아주고, 볼을 만져주시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는 일.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안아주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일 같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체온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되면서, 이런 메세지를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이 좋습니다. 나는 당신이 자랑스럽단다. 나는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가장 많이 연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끼리도 많이 연습하시면 좋습니다.
만지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만질 때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른들이 아이들이 귀엽다고, 아이들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성희롱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한다고 한 일이,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만질 때는 조심을 해야 합니다. 만지는 일은 매우 강력한 파급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만지심
우리 주님도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을 만져 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온 나병 환자도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41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주님이 나병 환자의 어디를 만지셨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의 어깨나 손을 잡아 주셨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만지심은 마가복음 1장 30-31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인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제자들의 간청하자, 주님이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고, 열병이 나았습니다. 이 밖에도 주님이 병을 고칠 때, 사람들을 만지셨다는 내용이 성경을 읽다보면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만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프신 분들을, 속이 상하신 분들을 안아주시고, 손을 잡아주세요. 그러면, 마음에 평안이 생기고, 병도 치유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아픈 사람만 만져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만져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13-14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주님은 아이들을 만져 주시는 일을 즐거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16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만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4-5). 우리 주님은 만지심을 통해,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서로 섬기면서 살라는 것이지요. 서로의 더러운 곳을 씻어주면서, 서로의 아픈 부분을 만져 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지기 싫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은 예수를 닮기 원하는 사람들이 누구를 만져야 하는지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닮고 싶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만지기 싫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보기만 해도 끔직한 병이지요. 만지기만 해도 전염이 될 것 같아 두렵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나병 환자를 격리하는 이유도,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지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더러워 보이고, 왠지 모를 고약한 냄새가 나는 사람들입니다. 이그러진 얼굴에서는 어떤 평화도 찾기 어렵고, 무섭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나병 환자 같은 사람만 만지기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라고 판명된 사람들도 우리는 만지기 싫어합니다. 절도, 상해, 강도, 사기. 이런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만지기 어렵습니다. 혹시나 우리에게 해를 끼칠까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의 손은 더욱 잡기 어려워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요.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만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예, 안 보고 삽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닮아간다고 하기에는, 한 없이 부족한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닮아간다고 하기에, 너무나도 갈 길이 먼,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죄인들만 만지기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 사람에게서 허물을 발견하게 되면, 만지기를 두려워 합니다. 외할머니가 임종하시기 며칠 전에야, 시간을 내서 외할머니를 찾아뵀습니다. 외할머니가, 제게 참 잘해 주셨는데, 저는 잘 못했습니다. 어째든, 집으로 들어가자, 외숙모가 외할머니 목욕을 시켜드렸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머니, 저 왔어요’ 하면서 방에 들어갔고, 침대에 누워계신 외할머니를 뵙습니다. 제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이, 외할머니의 손이었습니다. 각질이 다 벗겨져서 보기에 흉했습니다. 외할머니의 손을 잡으려다, 제가 움찔했나 봅니다. 그런 저의 모습에 외할머니도 손을 감추셨습니다. 외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놀랬습니다. ‘이건 아닌데… ’ 하면서, 외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렸습니다. 그러자, 외할머니가 인제서야 왔냐면서 서운함을 표현하셨습니다. 죽기 전에 보고 싶었다고 하시면서.
그래요. 다른 사람 몸에 난 작은 피부병에도, 우리의 몸은 자연스럽게 움츠려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더러워 보이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만지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을 닮아간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라 (엡 4:13)’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은 신통치 않더라도, 주님을 닮아가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내일은 달라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작년 보다는 올해가, 올해보다는 내년이 주님을 더 닮아갈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저도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많이 닮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고민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나병 환자를 만지신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으로 만져라.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보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가 얼마나 마음 고생을 하면서 살았는지 아셨다는 것이지요. 제가 외할머니의 보기 흉한 손을 만질 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용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외할머니의 손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 사람을 만질 수 있습니다. 거친 사람들, 매너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그 사람을 이해하면, 우리가 만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면 만질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만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게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만진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만짐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경험해야 되겠습니다.
둘째,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라. 나병 환자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더럽다고, 손가락질하고, 돌맹이를 던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질 수도 없는 인생은 참으로 처량한 것입니다. 슬픈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나병은 촉각이 없어지는 질병입니다. 살이 썩어도 아프지 않는 병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져주신 주님의 손길은, 먼저 나병 환자의 차가워진 마음을 녹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병이 나으면서, 죽었던 감각이 살아나는 것을 그가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따뜻한 주님의 손길이 그의 온 몸을 덮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주님의 만져주심이, 나병 환자에게 얼마나 강력한 사랑의 언어인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한 사람은 주님이 주신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만질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영적으로 보면, 죄악이 다 들어난 사람입니다. 죄는 숨기고 있으면 아름다워 보입니다. 죄는 숨기고 있으면 재미있고 신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죄악이 들키면 그것보다 추악한 것이 없습니다. 죄악이 들어나면,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만지지 않습니다. 악수도 안하지요. 더러운 죄악이 몸 밖으로 다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병에 걸린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한다는 의미는, 주님의 만져주심으로 나병이 나았듯이, 주님의 만져주심으로, 우리의 죄악이 깨끗해 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한 사람은, 나병이 주는 수치심에서 해방된 것처럼,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한 사람은, 죄악이 주는 수치심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한 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민망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져 주심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신 분은, 오늘 본문의 나병 환자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만져주심이 얼마나 좋은지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만일 아직도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시지 못하신 분이 있다면,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주님은 우리의 손을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손을 빌려 나병 환자와 같은 사람들을 만져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를 위한 바보” 라는 책은 남아프리카에 사는 데이빗 케이브 라는 사람의 간증입니다. 어느날, 이 사람에게 주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세수 대야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라는 명령입니다. 데이빗은 주님의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참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셈이지요. 주님의 흉내를 내는 일에, 멋진 교회의 목사직도 사임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일을 통해, 남 아프리카에 놀라운 영적인 부흥을 일으키셨습니다. 데이빗의 사역을 통해, 수 천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데이빗의 손을 빌려, 나병 환자와 같은 사람들을 만져주셨기 때문입니다. 데이빗이 사역한 그곳은, 사생아가 넘쳐나고, 폭력이 난무했던 곳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나병 환자가 우글거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만져주심이 절대로 필요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데이빗의 손을 빌려, 남아프리카에 소망을 부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도전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을 닮았다고 말하기에 아직도 한 없이 부족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손을 빌려서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손을 빌려 데이빗의 삶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손으로 마음이 상한 사람들, 질병으로 육신이 힘든 사람들, 악한 영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져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 주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못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못하지만, 주님이 만져 주시면, 사람들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손을 빌려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만지게 하십시오. 주님의 만져주심이,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은헤를 베푸소서. 하나님, 우리에게도 주님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도 만져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나이다. 주님의 손길이 닿는 그 곳에 깨끗함이 임한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도 주님의 손길이 임함으로, 우리의 삶도 깨끗해지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