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강하게 임했던 오순절입니다. 성경은 그 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고 되어 있는데요.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 제자들은 모두 성령 충만했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사람들이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고 놀라며 신기해 했고, 어떤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도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말을 모티브로 설교를 하는데요.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담대히 전했고, 이를 통해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던 역사적인 날이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마다 제게 드는 생각은, 참 부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 성령이 불같이 임하신 것도 부럽고,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도 부럽고, 사람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된 것도 부럽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공동체 안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면,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찼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에 절망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욕심을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성령이 이 땅에 오신 오순절을 기념하며, 소망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2.
그러면서 우리 안에 이런 질문이 동시에 생기는 것 같아요. ‘언제 그 날이 올까요? ‘우리의 기다림의 끝은 언제가 될까요?” 와 같은 질문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될까요? 시기와 때를 알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면 되는지 알게 되고,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다리는 일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다림은 현대인에게 매우 힘든 일입니다. 라면도 3분이면 끓여 먹을 수 있습니다. 3분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빨리 먹으면 좋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아니 저는 3분도 못 기다리고 그냥 먹어 버립니다. 배 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면서 말이지요. 사람들이 패스트푸드 점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아닌가요. 기다리는 시간이 짧으면 손님은 더 많아집니다. 영화 한 편을 다운 받는데 십년 전에는 하루 종일 걸렸는데, 지금은 몇 분이면 다운로드가 가능해 졌습니다. 클릭했는데 반응이 없으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 복음처럼 들립니다.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이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기다림이 없는 사회에 사는 것이 좋다는 이미지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바쁜데,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그래서 잠잘 시간도 없고, 먹을 시간도 없는 우리에게 기다림은, 가장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또한 아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자연 법칙도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씨를 심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는 기다려야 합니다. 간난아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이가 생기고 9개월을 부모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항상 힘든 일만은 아니고, 또한 힘들어도 우리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파수꾼은 아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반드시 아침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우리가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직장을 찾는 한 사람이 수 백 군데 이력서를 보내고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길게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은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런 진전이 없어 보입니다.
“주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우리가 이렇게 질문하고, 답답해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시지 않으세요.
우리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그 시기와 때를 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때는 주님이 잘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우리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한 약속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도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고, 애굽의 총리가 되기 까지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윗은 목동에서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까지 1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되는데, 8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시간도 70년이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렇게 오랜 기다림 후에, 좋은 결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다리길 잘했다’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요?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은 감사한데, 주님은 왜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실까 궁금했습니다. . 오늘 본문을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증인으로 살기 전에 해야 할 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라면, 제자들의 상태를 잘 아시는 주님이라면, 지금 바로 당장 성령을 보내 주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상태는 매우 불안했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평안이 제자들에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미래는 한 없이 불투명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은, 어떻게 듣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축복으로 들릴 수도 있고, 허무 맹랑한 말로도 들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선교를 명하셨지만, 그것을 뒷받침해 줄 사람도, 돈도, 조직도 없고,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그들의 출신이 말해주는 것처럼, 제대로 교육을 받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주님이 언변이 뛰어난 사람들을 추려서 뽑으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성령이라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즉시 성령을 주시지 않았다는 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한 주를 보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하고 있을 때, 예전에 있었던 한 가지 일이 떠 올랐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냐 하면,
제가 저희 집 텃밭에서 ‘잡초’와 더불어 무성히 자라고 있는 ‘깨’를 교회 텃밭으로 옮겨 심었던 일이 기억났던 것입니다.
깨는 생명력이 강해서 아무렇게나 뽑아서 던져놨다가, 원하는 곳에 옮겨 심어도 잘 살아나는데요. 그래서 제가 깨를 옮겨 심은 후에 별로 신경을 안 썼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교회 텃밭에 잠시 들려서 깨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봤는데요. 제 바램과는 달리 깻잎이 시들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신경좀 쓸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지, 또 옮겨 심으면 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 일 이후에, 다시 교회 텃밭에 가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죽어가던 깨가 파릇해지고 다른 잎들이 나왔을 뿐 만 아니라, 제법 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 마음에, 이 깨가 앞으로 엄청 자라서 잎이 무성해 지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깨를 다시 뽑아서 잡초가 무성한 다른 곳에 옮겨 심었습니다. 왜 그랬냐면, 깨 옆에는 귀하신 ‘참외’가 자라고 있어서, 깨가 참외를 죽이면 어떻하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은 하게 되어서 입니다. 제가 깨를 옮겨 심다가 또 흥미로운 것 발견했는데요. 제가 깨를 옮겨 심기 전보다, 깨 뿌리가 아주 촘촘하게 뻗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뿌리가 땅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던 기억이 생각났던 것 입니다.
이 생각을 가지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요. 말씀을 다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다리고 한 것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 즉 성령을 말하지요. 제자들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증인으로 살기 위해,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는 분, 그들의 상한 마음을 만져 주시는 분, 그들이 기도할 수 없을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왜 그 분을 기다려야 할까요? 그것은 제자들에게 주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내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그들이 접하게 될 세상은 환난과 고통이 몰아치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야유가 있는 곳입니다. 매로 치는 사람도 있고, 제자들을 십자가에 못 받을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에게 침 뱉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을 원망하고, 부정하고 죽으라며 모욕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그들이 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믿음의 뿌리’를 깊이 있게 내리는 것 뿐입니다.
뿌리가 깊으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으면 태양의 위협도 견딜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그들에게 공급해 주실 때, 그 생수를 힘있게 빨아들일 수 있는 뿌리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뿌리가 자랄 시간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입니다. 다시 말해 기다림의 시간들은 제자들이 준비되어지는 시간입니다. 성령을 받을 준비가 되는 시간이고, 주님에 대한 믿음이 뿌리처럼 자라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보니, 하나님께서 약속을 받았던 사람들, 즉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요셉, 모세에게 약속을 주시고, 항상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10년을 어떤 일은 20년, 어떤 일은 평생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그들이 기다린 것은, 그들이 받게 될 약속이 엄청난 것이었고, 그것을 받을 준비가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거룩하고 깨끗한 그릇이 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주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더 깊이 있게 자랄 시간을 주님이 배려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제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아시려면, 잡초를 뽑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잡초는 사람들이 밟아도, 심지어는 약을 뿌려도 다시 살아납니다. 왜 그럴까요? 뿌리가 깊이 넓게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기다림이 힘들게 느껴지시는 분이 있다면, 잡초를 뽑으시면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잡초가 어떤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비결은 뿌리에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해 보시고, 주님이 여러분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시는 이유를 발견하실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열매가 큰 법입니다. 기다림을 주시는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깊이 있게 뿌리 내리시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뿌리 내리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굳은 땅을 뚫어야 하고, 의심의 잡초와 우리 안에 있는 조급함과 게으름이라는 바위를 뚫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에 거의 15년이 넘도록 열매가 하나도 달리지 않는 대추나무가 있습니다. 매년 거름도 주는데, 무슨 병에 걸렸는지 열매가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몇 번이고 잘라 버리려고 했는데, ‘올해 만 참으소서’라고 말씀 하시는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얼마 전에 대추 나무를 보다가 제 조그만 눈이 커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 했습니다. 오랫동안 열매 맺지 못하던 대추 나무의 잎사귀에 꽃이 피어 있고, 벌들이 이 꽃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확인하시면 됩니다. 지금 꽃이 피었으니 말입니다. 자료를 찾아봤더니, 대추는 6월부터 꽃을 피우고, 9월에서 10월까지 수확을 한다고 합니다. 10년 넘게 아무런 꽃도 피우지 않던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자체가 신기하고 기적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러면서 제 안에 들었던 생각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나무의 뿌리가 땅 속 깊이 자리를 잡았다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 속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를 찾아봅니다. 주님이 우리로 기다리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뻗어나가기를 바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서 열매 맺으려면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면, 어느 새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이고, 이것이 영적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다가 너무나도 지쳐 버리신 분이 있다면, 잡초라도 뽑아서 그 뿌리가 얼마나 강력하게 땅에 박혀 있는지, 얼마나 넓게 뻗어갔는지 확인하시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를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로 기다리게 하신 것은,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좋은 것을 받기에 충분한 믿음의 뿌리가 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님을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3.
지금까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를 살펴봤는데요. 그렇다면 어떻게 기다리는 것이 좋을까요? 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보통 기다리는 일은 비생산적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거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기다리시나요? 아마도 많은 경우 휴대폰을 만지락거리면서 시간을 죽이실 겁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았는데, 요즘은 전자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기다릴 때 그렇게 시간을 죽일수 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이 고민을 좀 해 봤으면 합니다. 특히 그 기다림이 영적 축복과 관련되어 있고,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일이라면 특히 그렇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제자들에게 있었던 기다림의 시간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지금 그들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 서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기다렸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눅 24:50-53).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보이시나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지점에 서 있는 그들이 선택한 일이 보이시나요? 그 일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일들은 너무 엄청난 일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능력도, 배경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들에게 있는 배경은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증인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뭔가요? 기다림의 이유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이지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그것을 삶으로 보인 것입니다.
혹시 주님을 기다리시는 것이 힘드신 분이 있다면, 제자들처럼 해 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주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제자들에게 기다림은 힘듦이 아니라 기쁨이 되었습니다. 기약이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제자들이 기대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다 같이 한 곳에 모여서 기도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기다림의 방법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약속이지만, 혼자 기다리는 일이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해 봐서 압니다. 그래서 주님이 형제, 자매로 함께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요즘 더욱 절실히 깨닫고 느끼고 있습니다. 금요일마다 형제, 자매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데요. 제가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기도모임에서 한 기도들이 이 곳에 많이 심어져서,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이 자리에 앉기만 해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감격하게 해 달라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셨던 이야기인데요. 이 분이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셨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분이 이 말씀을 정말 믿고, 항상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아시지요’ 기도 끝! 뭔가 기도할 것이 생기면 기도제목을 종이에 적은 후에, 하늘을 향해 종이를 펼쳐 놓고 ‘주님, 아시지요!’ 기도 끝.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데, 길게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는 어떤 믿음이 있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날, 평소처럼 이 분이 ‘주님, 아시지요’라고 기도 끝 했는데, 마음에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고 해요. ‘그래 내가 너를 잘 안다. 그런데 너는 너 자신을 잘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 목소리에 이 분이 깜짝 놀랬다고 해요. 그리고 자신이 자신을 얼마나 아는지 생각해 봤는데, 결론적으로 잘 모르겠더랍니다. 그날 이후에 주님께 보다 구체적으로 기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모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항상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기도는 기도로 배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며, 주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매우 좋은 방법임을 이 시간, 여러분에게 깨달음으로 다가오기 바랍니다. 그 기도의 현장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아멘!
이것이 함께 기도하는 형제, 자매의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4.
지금까지, 주님이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고,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 정말 사모할 만한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 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믿으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바로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그릇이 못되기 때문이며, 우리 믿음의 뿌리가 연약해서 그렇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청소년기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부르셨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에도, 다윗은 10년 이상, 왕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나이에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아직 그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입니다. 그의 믿음의 뿌리가 튼튼해져야 했고, 그의 마음 근육도 튼튼해 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좋은 것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이후에야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다윗이 왕으로 준비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기다리신 것을 또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1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1년 아니 10년, 20년을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복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이여서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우셔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나요? 우리가 무엇이관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냐는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두 가지 반응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기다릴 걸’ 이라는 반응과 ‘기다리길 잘했군’이라는 반응입니다. 전자는 후회의 말이고 후자는 기쁨의 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말도, 이것입니다. ‘기다리길 잘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받기에 부족한 것 뿐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성찬식을 하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억할 뿐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아멘!
주님을 기다림이 우리에게 설레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찬양할까요.
주님의 시간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