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장과 14장은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사울과 바나바가 파송 받는 장면은 매우 인상 깊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을 선교사로 세우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며, 축복해 줍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이방인의 땅으로 향해 갑니다 (행 13:2,3). 모든 게 순조로와 보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출발했던 선교 여행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기쁨으로 충만했고, 예수를 믿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했을까요? 아니지요. 일부는 그들을 핍박하고, 욕하고, 돌을 던지고 죽이려 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면, 사람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며, 축복 속에 시작한 일이지만, 많은 경우 반대가 있고, 고난이 뒤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할 때 사람들의 금식과 기도와 축복이 필요한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가고 있는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라는 겁니다. 평안한 길이 아니라 고생스러운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런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강하게 임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이 성령 충만해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영혼 사랑에 대한 뜨거움을 주셔서 그랬을까요?
어찌되었든,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셨나요? 그리고 왜 그 길을 선택하셨나요?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좁은 문과 넓은 문, 많은 무리와 적은 무리 중에서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을수도 있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재물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의 끝은 너무나도 달라요. 하나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있고 싶은 것 같습니다.
아벨과 가인을 생각해 보세요. 둘 다 아담의 아들이지요. 아벨은 하나님을 택했고, 가인은 살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냥 두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롯도 그래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택했고, 롯은 소돔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두셨어요. 베드로와 유다를 생각해 보세요. 둘 다 주님을 부인했지요. 베드로는 자비를 구했고, 유다는 죽음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냥 두셨습니다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맥스 루케이도 중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했고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분노했고,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선택한 것이고, 어떤 사람은 증오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양 옆에는 두 명의 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가 한 일은 예수를 욕하고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세상을 저주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생을 마치면서 그들이 누리는 특권이라고도 여겨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두 강도가 실감나게 욕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사람들은 모여서 그들의 욕을 듣고 있습니다. 재미 있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같이 욕하던 한 죄인의 마음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중 하나는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시오.’하며 예수를 모욕하였으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너는 똑같이 사형 선고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도 싸지만 이 분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하였다. 그리고서 그가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39-43).
한 사람은 예수를 왕으로 인정했고, 한 사람은 예수를 모욕하며 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죄인을 설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셨지만, 그가 선택한대로 그냥 두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셨나요?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계시나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메세지를 듣었을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게 달랐다는 것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흥미롭습니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엇갈린 결정을 하는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선택하기도 하고, 예수를 거절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냥 두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분명 그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지만, 고난과 핍박도 뒤 따른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늘 본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교훈과 생활과 목적과 믿음과 인내와 사랑과 참고 견디는 것과 핍박과 고난과 그리고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또 내가 어떤 박해를 받았는지 그대는 따라다니면서 다 보았겠지만 주님은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다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딤후 3:10-12, 현대인의 성경)”
바울은 두 가지를 고백합니다. 첫째는 주님이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내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다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핍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있을 고난과 핍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상처가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에 찢김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얼마나 아플까요? 하나님이 하라고 한 일에는 보람도 있겠지만, 아픔이 있다고 말해도 될까요?
2.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고난과 핍박이 오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따로 있나?’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도 어려움이 생기면, 흔히 드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모든 장애물이 사라질 것 같은데,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바램일 뿐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장사를 영 못하시는 분에게 장사를 잘하시는 분이 비법을 알려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푸드 트럭 장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손님이 없습니다. 가끔 손님이 오시기는 하지만, 주인은 손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습니다. 멘토를 하시는 분이 이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요. ‘주인이 손님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랬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손님의 외면이 주인에게 상처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럴 것도 같아요.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다면 속상할테니 말입니다. 먹고 살려고 시작한 일인데, 무심하게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야속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 받은 주인들이 하는 일이 손님들을 외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주인도 상처를 덜 받기 위해서 나름 노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멘토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살려면 물 먹듯 상처를 받아야 된다’고 말입니다. 충격적인 말이였지만, 맞는 말이었습니다. 손님들에게 받는 외면이라는 상처에 익숙해져야 장사도 할 수 있고,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면 물 먹듯이 상처 받을 수 있어야 된다’ 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해 준말도 그런거 아닌가요?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고난과 핍박이 있다 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옷이 찢기고, 몸이 찢겼습니다. 예수님도 물 먹듯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주님을 모욕했습니다. 채찍으로 때리고 못으로 주님의 발과 손을 찢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했던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입니다. 주님이 물 먹듯 상처를 받으신 겁니다. 주님이 이런 길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 길의 끝에 영광의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 (히 10:19,20)’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로 우리가 하늘로 가는 영광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상처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요?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경이 유대인들을 보는 반응이예요. 사도행전 14장 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한 유대인”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분노로 가득했던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한 사람들’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도,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 먹듯이 상처를 받아야 살아날 수 있는 것같이, 영적으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주님이 받으신 상처로 새로운 살 길이 열렸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고난과 핍박을 참고 견디어 냄으로, 그들을 통해 새로운 살 길이 열렸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도전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받는 상처로, 새로운 살 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칭찬보다는 비난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백 마디 칭찬보다는 한 마디 비난에 넘어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발견한 것은 3절 입니다.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여(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행 14:3, 새번역)”
바울과 바나바는 고난과 핍박이 왔을 때 주님을 의지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변 환경이 바울과 바나바를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환경을 지배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걷다가 힘들고 지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주를 의지하는 것이고, 담대함 입니다. 주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하시는 분들도 수 도 없는 상처를 참아냅니다. 살라고 하는 그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삶을 위해 하는 일은 더 숱한 상처가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길의 끝에 새로운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돌로 치려고 하자, 도망간 곳이 바로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구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면 고난과 핍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 새로운 살 길이 열리는 법입니다. 주님이 가라는 그 길을 걸어가시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힘과 담대함이 있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