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라고 읽고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이 “ 근데 왜 저 인간은 왜 오래 참지 못하지? 나를 사랑하지 않나?
“사랑은 온유하고”라는 구절을 읽고, 그 다음 드는 생각이 ‘저 인간은 왜 친절하지 않지?” “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를 읽고 ‘왜 저 인간은 나에게 무례하지”라고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저도 자꾸 남 탓 할 때가 있습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가 내 눈에 있는 기둥보다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때마다 속으로 제게 해 주는 말이 있습니다. ‘너나 잘해라’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내 안의 모습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울 삼아 우리가 입은 옷이 잘 어울리는지,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말만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보다는 다른 사람들 판단하느라 바쁘고 나아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죄하느라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모습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항상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래야 우리고 입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에 걸맞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다는 말씀은 사랑은 예의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예의는 사회나 문화에, 또는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직장 상사를 복도에서 만났을 때, 3보 떨어진 위치에서 먼저 인사말을 건네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예의라고 설명해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상을 보면서 예의를 지키다는 것이 쉬운 듯 하면서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의 교육을 하는 이유는, 이런 사소해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때로는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하고 존경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예의를 잘 지키는 편입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깍듯이 예의를 지킬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의 기분이 상해서 불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 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의를 지키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부부, 부모, 연인, 친구, 교회 식구들과 같이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다할 때 그렇습니다. 편한 관계이고 친하니까, 아무렇게 말하고 대우해도 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험하게 대해도 상처 받지 않는 관계가 진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는 착각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옆집 남자에게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면서도, 남편에게는 아무렇게나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옆집 여자에게는 자상하고 친절한데, 자기 아내에게는 쉽게 화를 내고 생각나는대로 아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번 만나고 다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편하니까 …친하니까…” 이런 이유로 함부로 대하다가 사랑하는 사람들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부끄럽게 이건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성경 말씀보다는 세상에서 배운 것들에 더 익숙해져 그런 것 같아요. 어떤 분은 이런 사람을 ‘어리석다’라고 표현하셨더라구요. 제 안에는 이런 어리석은 모습이 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라는 것은 상대방을 존경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를 불문합니다. 아이들도 어른들이 존중해 주면 좋아합니다. 몇 개월 안된 아이에게도 어른들이 의견을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안아줘도 될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살아온 날이 몇 개월 안된 아이도 싫고 좋고를 분명히 합니다. 아이가 싫다고 했는데 억지로 안으려고 하면 아이가 울어 버리지요. 자기의 의견이 무시당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자신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아 아이보다 훨씬 더 자란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특히 부모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례히 행할 때 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무례해도 된다는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생각은 우리가 빨리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물론 저 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먼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해 주는 곳이 살만한 곳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남편이 갑자지 친절해지고, 아내가 갑자기 친절해 지면 ‘왜 이래? 무슨 일 있어’라고 하면서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신 속으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구나”라고 간주해 주시길 바랍니다.
3.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원수를 위해 돌아가신 그 분은 우리에게 큰 소리치실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은 메시아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위치에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깨서 부활하시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스승이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두 사람을 예수께서는 혼내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자신이 머물 곳을 준비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집 안으로 허락없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들이 청한 후에 그들의 집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얘의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만난 후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예전에는 정의의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혈기가 왕성했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 그의 태도는 180도 다른 것입니다.
같은 동포가 자신을 때리고, 옥에 가두고, 매질을 하고, 나아가 죽이려 해도, 바울은 그들에게 쉽게 화를 내거나 그들에게 무례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동포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구원받기를 누구보다 원했기 때문입니다.
4.
전능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 마디만 하시면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벌을 주고, 지옥불을 보여주고 그러셨으면, 얼마나 효과가 빠르고, 강력했을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는 방식은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예의를 갖추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자신을 향해 욕하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강력한 힘으로 부서버리지 않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주님께 반응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집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복장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례라고 하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가족들을, 친구들을 배려해 주고 존중해 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울 삼아 우리의 영혼의 모습을 비춰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옷을 입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우리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다시 보면 무례함으로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무례함은 우리에게 상처로 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금이 가는 이유는 ‘무례함’ 때문입니다. 데이트 폭력이 한 예입니다. 사랑하니까 마무 대합니다. 때리고 협박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아니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범죄 행위입니다. 사랑하면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서 무례해지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사람들이 이혼을 하는 많은 이유도 무례함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부부 관계는 본인들만 아는 것이겠지만, 사랑이 무례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같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례함이 권리이고, 권력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없다면, 우리도 어느새 무례함을 당연히 여기는 세상과 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을 아시나요? 그는 그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찬란한 갑옷 속에서 그의 몸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센병. 문등병 때문입니다. 그에게 복음이 들렸습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에게 가면 그의 병이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를 맞으러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강의 군대 장관이 왔는데 엘리사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분노합니다. 그 이유를 한 번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엘하 5:11)
나아만은 엘리사가 무례하다고 여겼습니다. 자기와 같이 위대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대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엘리사가 행동하자, 나아만은 그가 무례히 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나아만이 병이 나은 후에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하 5:14)”
“자기 생각대로” 사는 나아만의 모습과”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살아가는 나아만의 모습은 천지 차이 입니다.
사랑하면 무례히 행해도 됩니다는 “자기 생각대로”입니다.
사랑하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합니다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깨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우리들이 주님께 보여드려야할 태도입니다 .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