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 섭섭하고, 또한 그 일은 우리 마음에 상처로 남습니다. 어떤 분은 그런 일을 당하면 화를 불 같이 내기도 합니다. 반면 어떤 분은 화를 참고 그 상처를 마음 속에만 담아 두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운했던 때를 끄집어내서 묵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이신가요? 저는 후자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마음 속 깊이 담아 두었다고, 가끔식 혼자 열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도 아시지만, 저도 상처 받습니다. 상처가 깊으면 너무 억울해서 잠이 잘 안오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그런 경험이 없으셨기를 바라지만, 혹시 불면증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있다면 주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째든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자꾸만 묵상하다보면 생기는 것이 원한입니다.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이 망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은 나의 원수가 망하는 것은 나의 행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나의 원수가 성공하면 그것이 나의 슬픔이되고 불행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내게 상처준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이 결정되어 버리게 됩니다. 원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어 버린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산다는 것이 참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고, 우리가 기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여러가지 특성을 보여주는데, 그 중 하나가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면, “상랑은 원한을 품지 않는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KJV에는 사랑은 악을 생각하지 않느다고 되어 있고, NIV 영어 성경에는 사랑은 잘못한 것들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실수나 잘못으로 개인적인 손해를 많이 보면 그것을 적어두었다가 기회가 될 때마다 갚으려고 하지는 않나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부정적이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과거에 얽매여서 살게 되는 것을 주님은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얽매여서 지금,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주님의 말씀처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사나요? 아니면 우리의 본성이 시키는대로 살아가고 있나요?
이는 우리를 욕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에게 무례히 행한 사람들, 우리를 무시한 사람들이 잘 못되기를 바라지 않고, 그들에 대한 나쁜 기억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나쁜 기억들은 빨리 없어지고, 우리에게 있는 좋은 기억, 행복한 기억만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바도 그렇습니다. 짧은 인생인데, 다른 사람이 내게 한 잘못한 것은 모래 위에 새기고, 다른 사람이 내게 베푼 은혜는 바위에 잘 새기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보람있고 가치 있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고, 감사하며 사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성경에는 많은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어두운 그림자가 없는 사람 같습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물론 아시겠지만, 요셉의 인생이 항상 평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인생은 사망의 음칙한 골짜기와 해로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인생에는 큰 바람과 파도가 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영혼은 맑고 투명했습니다. 어찌보면 상처투성이 인생이 요셉의 인생입니다.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요셉은 어릴 적에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로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형제들을 요셉을 애굽으로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형제들이 원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큰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지고, 애굽에 팔려가는 그 순간까지 얼마나 큰 공포와 좌절감이 요셉에게 있었을지 알 수 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애굽에서, 누군가를 섬기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펐을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요셉의 노예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애굽 주인의 마음에 들어 나중에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노예인 요셉이 권력형 성추행과 성폭력에 시달렸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해를 입은 것은 주인의 아내가 아니라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를 탐하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아내를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을까요? 그렇지만 요셉에게는 원수를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요셉에게는 감옥에서 석방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저도 잘 안돼서 2년을 감옥에 있어야 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에는 이렇게 나쁜 일들만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 때마다 요셉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묵상하면 화가 많이 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원수를 갚을 것이라고 다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셉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도 요셉은 원수 갚는 일에 자신의 힘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요셉은 원수 같은 형들을 만나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창세기 45:5, 7,8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의 마음에는 형제에 대한 원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요셉에게는 자신의 삶 가운데 일어난 모든 나쁜 일들이 도리어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준 사람들에 대한 어떤 원망도 없습니다. 그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복수가 나의 힘이라고 했다면 창세기 45장에 나오는 고백은 없었을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으니 하나님이 그의 삶에 개입하실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요셉의 삶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요셉의 삶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가 창세기 45장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어려운 순간마다, 아니 항상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니, 성경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은 마음 판에 새겨서 원수를 갚아야 시원한 것이라면, 우리의 본성을 이기는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면 어떤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은 요셉의 고백처럼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나쁜 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선하게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믿음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오늘 본문말씀처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묶여 살지 않고 보다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삶의 에너지가 악한 것을 생각하며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의 삶에 충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어려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의 삶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통해 요셉은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가 순간 순간 경험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런 상상을 보세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기억하신다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 아닌가요! 우리가 하나님께 섭섭하게 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질 때마다, 그것을 하나님이 돌에 새기신다면 우리는 항상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남편이 아내가 잘못한 것들을 마음 판에다 깊숙히 새겨놓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아내가 남편이 잘못한 것을 마음 판에 새겨놓고 있다면 어떨까요? 자녀들이 부모들이 잘못한 것을 마음판에 새기고 있다면 어떨까요? 또한 부모들이 자녀들이 잘못하고 실수한 것들을 마음판에 새기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생각만 해도 끔직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새겨 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가 행한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못한 것을 기억해 두셨다가 우리를 사망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수해야 기분이 좋아지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주님은 우리가 범사에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도 선한 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은 형편없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대한 기대를 져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믿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은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상처 준 것은 다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바로 부모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강건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서로의 허물은 덮어주고, 혹시 상처가 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마음에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에게 넘쳐 흘러야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여전히 오래 참으시고, 우리의 악한 것을 기억하시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탕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아버지의 유산을 들고 외국에 나가 모두 다 써 버리고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시나요? 거지꼴을 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달려가 안아주고 좋은 옷을 입힌 후에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악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아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니다. 아버지의 아들답게 다시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기도 합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악한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상처준 사람들의 말이 우리 마음에 다 남겨 두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셔서, 우리로 과거에 얽매이지 않게 하옵소서. 대신에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보기를 원합니다. 요셉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지금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주님의 자녀들이 있다면, 주님 위로하여 주십시오. 그래고 요셉처럼 우리도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