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미국과 한국 뉴스를 보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요. 아마 ‘거짓말’이 아닐까 합니다. 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치명적이 될 수 있는 사건이 기도 합니다. 거짓말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졌는지를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합니다.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태어나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거짓말을 구사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아도 거짓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즐거움을 모색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어른들도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쉬운 길을 찾아가다 보면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나쁘다고 말하지만, 사실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므로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또한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요즘 저는 ‘M. 스캇 펫’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쓴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시간이 되시면, 이 책을 읽어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거짓말’과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펫이 환자들을 만나서 치료하면서 배운 내용들을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또한 거짓말이 정신 건강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들도 잘 정리되어 있어 매우 유익한 책입니다.
책에서 스캇 펫은 거짓말에는 ‘까만 거짓말’과 ‘하얀 거짓말’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까만 거짓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반면 ‘하얀 거짓말’은 내용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진실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빼 버리고 말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까만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두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20:16 “네 이웃을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밖에도 까만 거짓말의 예는 참으로 많지만,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회사의 제품이 유기농 재료를 사용했다고 광고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 경우가 까만 거짓말에 해당할 것입니다. 까만 거짓말은 진실이 밝혀지고 나면 매우 치명적이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이 중국에서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겠지만, 중국하면 가짜가 판치는 나라라는 악명이 있습니다. 가짜 달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농약을 먹고 자살할려고 했는데 죽기는 커녕 옷을 벗고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농약이 흥분제가 들어 있어서 죽기는 커녕 옷을 벗고 뛰어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농약이 가짜여서, 까만 거짓말 덕분에(?) 아까운 목숨을 잃지 않게 된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야기입니다.
3.
까만 거짓말과는 달리 하얀 거짓말은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용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진실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빼 버리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하얀 거짓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준다든지’하는 식의 거짓말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기에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들이 엄청 싸우고 나서, 안 싸운 척 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마음이 넓은(?) 아이들은 부모들이 싸운 걸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해 주지요. 하지만 스캇 펫은 이런 경우도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얀 거질말이라고 항상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도 있습니다. 검열을 통해 국민에게 기본적인 정보를 감추는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얀 거짓말도 까만 거짓말처럼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거짓말의 결과가 매우 파괴적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무엇이 거짓인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또는 거짓을 말하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바예수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 또는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으로만 보면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신뢰가 가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를 ‘거짓 선지자’라고 소개합니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지만, 바예수라는 사람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바예수는 자칭 하늘의 계시자 행세를 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치료했던 사람인 듯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고, 사도 바울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 옆에 있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거짓 선지자가 아닌 진짜 선자자처럼 여겼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가 하는 말을 좋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이 바예수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유대인들이 알았다면 율법에 따라 이미 그를 처벌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거짓된 것을 구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예수의 아들, 여호수아의 아들이 설마 거짓 선지자로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도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 바예수라는 사람에게 속으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의 사람을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이를 알아보지 못한 지혜의 사람 서기오 바울의 모습,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거짓과 동거하면서 우리가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속이면서 사는 한 인생, 그리고 속임을 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5.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이 되 돌아옵니다. 이렇게 거짓이 난무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또한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 안에서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한 고민이, 스캇 펫의 책을 보면 나옵니다. 그리고 몇가지 지침이 나와 있는데요. 여러분과 그 내용을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결코 거짓을 말하지 말 것.
‘스페셜 라이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유뷰브에 나온 내용을 조금 봤는데요. 연극의 내용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거짓말을 시작하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지요. 스캇 펙은 거짓말을 할 때 사용하는 에너지가, 진실을 말할 때 사용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이 들어간다는 말해 줍니다. 까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괴로워집니다. 끝도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고, 그러다가 우리의 인생이 끝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거짓에 묶여서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어 갑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해서 거짓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기 때문입니다.
둘째, 진실을 숨기는 행위는 거짓말과 같을 수 있다는 점을 마음에 둘 것. 진실을 숨겨야 하는 모든 과정에는 도덕적 결정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얀 거짓말을 할 때 조차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진실을 숨기는 것이 개인적인 필요 또는 권력이나 호감을 얻기 위해서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진실을 숨기려는 결정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내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섯째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평가하는 것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아주 미묘해서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 행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다른 사람의 필요를 평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당사자가 영적 성장을 위해 진실을 유용하게 사용할 능력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조언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오늘 본문의 바예수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왜 그가 거짓 선지자로 불리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8절을 보시면, ‘이 마술사 엘루마는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예수는 진실을 숨기는 결정을 자기 입장에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총독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총독을 위해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누렸던 것들을 잃을까봐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 아닌가요?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성경은 그를 거짓 선지자라고 단정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 아닌가요?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말씀아닐까요? 하얀 거짓말이었다고 바예수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거짓 선지자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9절에 보면, 바예수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이 누구인지가 나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바예수의 마음을 읽어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예수가 얼마나 거짓된 사람인지를 말입니다. 바울이 바예수의 마음을 읽어 버린 것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진실되게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거짓을 따라 행하지 않고, 지혜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바예수처럼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성령에 충만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바예수는 지혜자를 돕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는 사람에 불과햇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바예수처럼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바예수의 모습은 그가 유별나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보았으면 합니다. 어쩌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냥 나타난 것 뿐입니다.
바예수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요한 1서 2장 1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 1서 2:16)’
바예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이 땅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그는 거짓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예수는 진리되신 예수가 서기오 바울에게 소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바예수는 서기오 바울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망치고 다른 사람도 망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진리되신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로 잠시동안 소경이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짓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정직한 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시편 112:4)’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10)’
그렇지만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바예수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리고 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하나님 제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는 기도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6)’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정직한 영이 아닌 거짓의 영만 가득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될 것입니다. 바예수에게 붙었던 서식어도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 선지자 처럼 보이지만 가짜라는 것 아닌가요.하나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나의 욕심이 이끄는대로 살아간 바예수에게 붙여진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붙여지지 않을까 두려워 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기 힘든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한 것은 성령에 이끄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욕심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가 또한 정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고 성실을 다하는 자세가 정직한 모습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를 통해 향하시는 주님을 또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