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 휴가 차 다녀 왔습니다. 그곳에 한 성당 건물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방문을 했더 랬습니다. Cathedral Basilica of Saint Louis 라는 곳인데요. 성당 건물 밖과 안을 들여다 보면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성당 규모도 어머어마 하구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술 작품이고, 화려합니다. 온 건물은 퍼즐을 맞추듯이 성경에 나온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지 창조에서 예수의 재림까지 성경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그려놓은 그림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성당 지하에 있는 박물관에도 갔었는데요.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당의 중앙 앞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의 상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상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멋있게 잘 꾸며져 있는 건물 내부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잠시 방문한 곳이 있는데요. 세인트 루이스 아트 박물관(Art museum)입니다. 이곳에도 볼거리가 참 많았습니다. 그 중에 제 눈에 띄는 그림들이 있었는데요. 르네상스 초기 그림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주보에 나온 그림도 그 중 하나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림 뿐 아니라 성경 내용으로 그림을 그린 작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르네상스 초기 작품에 나오는 예수님 그림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아기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그림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사람마다 그리고 시대마다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가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면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어떤 시대는 아기 예수에 매료되어 그 속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니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사람들 마다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다르고, 예수를 바라보는 시선도 매우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곳을 방문하면서 제 안에 어떤 불편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곳에 있는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의 모습이 어색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를 이런 화려함으로 찬양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또한 항상 엄마 품에 있는 아기 예수 그림들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수님이 항상 아기로 표현된 이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술 작품안에는 그 당시 사람들 마음 속에 담겨져 있는 것들이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에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던 예수의 모습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아기 예수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예수의 이미지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엄마 품에서 해 맑게 웃고 있는 평안한 아기의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엄마인 마리아에게 의존해야 하는 아이의 모습은, 예수께 자신의 삶을 맡기기 싫어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 인생에 끼여들어서 간섭하지 마시고,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만 해 주는 귀여운 아기의 모습’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듯한 해석 아닌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요?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의 이미지 이신가요? 아니면 엄마 품에서 해 맑게 웃고 있는 예수의 모습인가요? 그리고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신가요? 우리는 왜 예수가 필요한 것일까요? 예수가 구원의 말씀이 된다고 하셨는데, 과연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일까요? 필요하다면 왜 하필 예수이신가요?
2.
오늘 본문은 바울의 설교 내용의 후반부 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가 왜 필요한지, 예수께서 왜 메시아가 되시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에 대한 이미지와 바울이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인도해낸 모세처럼,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열망은 고통받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강력한 지도자가 였던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삶의 모든 영역의 문제들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평강의 왕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선지서를 외우고 읽으면서, 메시야가 꼭 오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지만, 메시야인 예수가 이 땅에 왔지만, 진작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머리 속에 그려 놓은 예수의 이미지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고 있었지만, 예수를 알아보기는 커녕, 외운 말씀으로 예수를 죽이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를 대접하기는 커녕 예수를 핍박했고, 자신들의 적군이 로마의 권력을 이용해 구세주 예수를 죽여 버렸습니다. 사람들 눈에 보였던 에수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이 상상하고 있는 메시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로마 제국과 싸우려는 아무런 의지도 없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수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구원할 메시야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동안 예수께 열광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였습니다. 아픈 사람이 나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으며, 배 고픈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헐벗고 배 고픈 백성들, 로마의 억압 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구원해 줄 사람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잠시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매 달려 돌아기신 예수의 모습은 무기력 그 자체일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없는 모습일 수 도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예수는 저주 받은 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의로운 일을 하셨지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허무하게 돌아가신 분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에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없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3.
물론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일들은 ,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응한 일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을까요? 또 다시 같은 질문이지만, 과연 우리는 예수가 필요한가요? 우리에게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요? 화려한 장식품에 둘러 싸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엄마 품에 있는 안겨 있는 아기 예수의 모습일까요?
바울은 그의 메세지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소개하는데요. 먼저 바울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로 세우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 들어오셨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부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주로 세우시기 까지, 우리 입장에서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수 천년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로 구주를 세우는 일이 그 만큼 신중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오랫동안 인류에게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게 하셨을까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가 필요한가요? 예수가 구원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어떤 구원을 원하고 있을까요? 같은 질문입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생명이고, 길이고,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재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고자 하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거늘..’ 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 없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이 왔나요? 하나님 없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성경이 고발하는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악함입니다.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사사기가 고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 결말은 허무만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쾌락을 누려본 솔로몬 왕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 하나님 없이 살아본 사람의 탄식이며 후회인 것입니다.
로마서 3:23절 말씀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 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오랜 시간을 두고, 인류에게 들려주고 싶어셨던 메세지입니다. 너희 인간들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고,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사람은 피의 제사를 통해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예수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요?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의 이미지는 우리를 대신해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능욕을 당하시고, 침 밷음을 당하셨으며, 채찍질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이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게 위함인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이미지입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가 부활하심은 우리가 그의 피로 죄사함 받았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 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우리가 알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예수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길이 열렸음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