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뭐예요?” 요즘 제가 한글 학교에서 가르쳤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취미란 인간이 금전적 목적이 아닌 기쁨을 얻는 활동이라고 정의됩니다. 통계자료가 있어서 따르면, 한국 사람에게 ‘취미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1위가 ‘등산’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한국에 산이 많고 건강을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취미로는 산책/걷기, 독서, 음악 감상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 취미는 물고기 기르기입니다.
저희 집에 선셋과 지브라피쉬라는 두 종류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제가 매일 출근하면서 물고기가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관찰을 하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선섹이라는 물고기는 알은 몇 개 안 낳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새끼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잘 돌본다는 것입니다. 반면 지브라피쉬라는 알을 많이 낳는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물고기 주인들이 따로 관리를 안해주면, 자기 알을 다 먹어 버립니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선셋과 자기 낳은 알도 닥치는대로 먹어 버리는 지브라피쉬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선셋은 숫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고, 지브라피쉬는 몇 년 동안 거의 숫자가 같습니다. 제 취미 생활 이야기를 한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취미 생활이 ‘곳간 짓기’가 아닐까 해서 입니다. 부자의 인생에 풍년이 들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 곳간이 올해 얻은 소출을 다 저장하기에 역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러분도 이런 고민 해 봤으면 좋겠지요? 너무 돈을 많이 벌어서 어떻게 해야지 고민해 보는 것 말입니다. 부자는 예전 것은 다 허물어 버리고, 더 큰 곳간을 짓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새 포두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니 이를 대비해야 합니다’ 이게 아마도 부자의 생각이었던 같습니다. 새로 지은 곳간을 구상하면서 부자는 얼마나 큰 기쁨과 설레임 속에 있었을까요. 올해 보다는 내년, 내년 보다는 내 후년에 더 큰 곳간을 짓고 싶은 소원이 부자에게 있었을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만 이런 마음일까요? 우리들도 비슷한 마음이 있습니다. 좀 더 좋은 집, 좀 더 좋은 차, 좀 더 좋은 물건을 사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은 우리는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자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은 지 모르겠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입니다. 부자가 너무 정직하게 자기 마음을 보여준 것 같아요. 혼자 생각하는 것이니 무슨 생각인들 못하겠습니까 마는.
곳간을 쌓여 있는 물건이 많아질수록, 통장 잔고가 늘어날 수록, 은퇴 자금이 늘어날 수도록, 우리는 부자처럼 말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언젠가는 쓰겠지 하면서 하면서 새로산 물건을 창고에 가득 채우고 사는 현대인의 모양새도 비슷한 면이 있지요. ‘내 영혼아 창고에 쌓여 있는 물건을 보렴. 그러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리가 말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내 영혼아, 아직도 부족하다. 이걸로 만족하면 안돼. 내년에는 좀 더 큰 곳간을 지어야해. 내 후년에는 더 큰 곳간을 짓는 꿈을 꾸어보자’라고 말입니다. 세계적인 부자였던 록펠러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있어야 부자가 될까요?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1 달러 더’ 부자는 “ 1달러 더” 있으면 될 것 같다는 이야기 입니다. 내일 엄청난 돈을 벌고서도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1 달러 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부자가 되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자가 되려면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탐심이 얼마나 끝이 없는지도 잘 보여주는 말 같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인 것 같아요. 부자처럼 되고 싶고, 부자처럼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야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스스로 기뻐하고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부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부자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의 속 이야기를 들으시며 그를 어리석다고 표현하십니다. 왜 어리석다고 하셨을까요? 미래를 대비하고, 열심히 일한 그가 어리석은 건가요? 우리가 생각할 때 부자는 지혜로운 사람 아닌가요! 생활력도 강하지요. 미래를 예비할 수 있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어리석다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에게 왜 어리석다고 하셨을까요?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 있을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부자를 어리석다라고 평가하신 이유는, 부자는 소유와 생명을 같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소유가 많으면 생명도 길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소유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인생도 길어지고 풍성해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열심히 일합니다. 돈을 버는 이유는 오랫동안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소유가 아무리 많아도 생명이 우리 마음대로 연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소유가 없어도 생명이 풍성해진다는 것을 알기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은, 우리가 가진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자에게 말씀하셨지요.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하나님이 생명을 빼앗아 간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찾아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빌려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소유와 생명 모두 우리는 잠시 빌려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돌려달라고 하면, 우리의 생명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없어진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고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이 많으면, 슬프게도 자녀들끼리 싸우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했으면 합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부모의 생명이 없어지자, 부모가 써 보지도 못했던 많은 소유 때문에 자녀들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많이 가져보겠다고 싸웁니다. 형의 몫도 내 것. 내 것은 내것 이라는 동생의 탐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소유의 풍성함을 즐거워하던 부자가 보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소유의 풍성함이 생명의 풍성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속이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입니다.
3.
사실 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삶의 염려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염려는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바로 먹는 것과 입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만 해결되면 사람들은 모든 염려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무언가 있다면, 평안해 질 것 같고, 쉼을 얻을 것 같고, 즐거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유가 많아지면 염려가 사라지나요? 창고에 물건이 쌓여가면 염려가 사라지나요? 과연 부자들은 염려가 없을까요? 여러 해 많이 쌓아둔 물건을 보면서, 오늘은 만족할 지 모르지만, 그 다음날은 또 염려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가지고 돈이라면 3년까지는 마음껏 쓸 수 있어.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떡하지?’ 이게 부자들의 고민이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몇 십년은 쓸 수 있는 돈이 있어야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러다 보면, 부자이지만 여전히 마음은 가난합니다. 삶에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늘어가는 것은 욕심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탐심이라고 부릅니다. ‘좀 더’ ‘좀 더’ 곳간에 여러 해 쓸 물건이 많은데 여전히 염려가 가득합니다. 탐심이 그를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탐심이 가득한 삶의 특징은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자에게 어리석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밭에 소출이 많은 이유는 때를 따라 내린 비와 태양 덕분입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덕분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습니다. 또한 자기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독백은 온통 ‘내가 내가 내가’ 라는 말 뿐입니다. 우리 안에 탐심이 생기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부자에게 어리석다고 하신 이유는, 그의 재물도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 것 같은데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잠시 맡아서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입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 충성되어 사용하는 것이 청지기의 책임인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내 것처럼 사는 부자가 어리석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인이 일을 그만 두라고 하면, 주인이 영혼을 찾아가시면 분명해 집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찾아가면 두 손을 펼치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소유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사는 삶일까요?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이 무엇일까요? 이런 고민도 생기는 것 같아요.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이냐 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먼저 우리가 새겨 들어야 할 주님의 경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탐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욕심이 있다는 것은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면 탐심이 됩니다. 유산 문제를 들고 찾아온 사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탐심을 물리치라’ 다른 성경에는 ‘탐심을 조심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탐심은 우리에게 불연듯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탐심을 우리의 꿈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계를 넘어서는 것인데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탐심을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큰 죄악이라고 말하실지 모르지만, 탐심을 성경은 큰 죄악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앞에 나오는 단어들은 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런데 탐심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은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추구하다가 그것을 하나님의 위치에 놓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요. 탐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사는 어떤 남자가 가난한 고향집을 떠나 외국에 돈을 벌러 갔습니다. 25년이 흐른 후에, 이 남자는 자기가 꿈 꾸었던 것처럼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결혼해서 아내와 아들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꿈을 이룬 남자는 가족들을 데리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금의환양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와 동생은 여전히 작은 여인숙을 운영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식구들을 놀라게 하려고, 아내와 아들은 다른 호텔에 머무르게 하고 자기 혼자 어머니가 운영하는 여인숙에다가 방을 잡았습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인지,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 남자를 못 알아왔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외국에서 번 돈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했습니다. 그 날 밤 어머니와 여동생은 아들이 자는 방에 몰래 침입해서 잠들어 있는 아들을 망치로 쳐 죽이고 시체는 강물에다 버렸습니다. 자기의 친 아들이요. 친 오빠인인지 모르고 돈이 탐나서 살인 강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튿날 며느리가 나타나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탐심이 사람을 이렇게 무섭게 만듭니다. 탐심은 우리의 이성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그래서 탐심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나요. 탐심이 우리를 잡아 먹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탐심을 물리치라” 탐심을 조심하라. 우리 마음에 탐심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주는 행동 강령이고 지침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지침입니다. 그 지침을 따르려면 주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22,2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우리의 삶은 염려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에 집중하다가, 그것을 위해 염려하다가 우리는 더 중요한 목숨과 몸은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키를 한자 늘릴 수 없지만, 염려하면 우리의 키는 한 자 줄어듭니다. 그런데 주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염려가 안되나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게 믿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곳간에 평생 쓸 물건이 없어도 평안하고, 쉴 수 있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따라 염려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것이 평안이고 쉼입니다.
예수님이 예로 드신 것이 ‘까마귀와 백합화 입니다’ 이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들을 보살핀다. 내가 기른다. 그러니 너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있는 물고기도 염려가 없습니다. 주인인 제가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두커니 어항 앞에 서 있으면 물고기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주인님이 밥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고기가 애교를 떨면서 음식을 기다리는데 음식을 주지 않을 주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고기보다 귀한 사람을 먹히시고 입히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탐심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탐심이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 삶은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면 이런 찬양을 하게 됩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 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왜 걱정이 없을까요?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니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이게 말이 됩니까! 예. 말이 됩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고 먹이신다는 믿음입니다. 내일 먹을 것이 없어도 평안히 잘 수 있습니다. 쉴 수 있습니다.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둡지요.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노후도 평안하다고 뉴스를 들으면 불안해 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믿어지면 우리가 평안히 잘 수 있습니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두 번째 권면이 있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3절)’ 이 말씀은 부자에게 하신 말씀을 거꾸러 한 말씀이십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사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처럼 땅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것을 구제하는데 사용하면 우리가 궁핍해 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소유로 구제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과 형제를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부자는 자신이 먹고 남을 만큼의 부가 있었지만, 빵 부스러기도 나사로와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에 있는 개에게 주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나사로에게는 그것마저도 아까워 했습니다. 그가 천국이나 지옥에서 발견된 이유입니다. 그 마음에 탐심이 가득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한 이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을 충분히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남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몫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포기하는 것이 탐심을 죽이는 방법입니다. 탐심을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한 부자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생겨야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 생기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책임져 주십니다. 그 믿음도 생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부자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 안에 염려가 사라집니다. 평안합니다. 쉴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함께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