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습니다. “정준영”, “승리”라고 연예인들이 나눈 카톡방의 대화 내용이 그것인데요. 그들에게 대화 내용을 보면, 여자는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불법 영상들을 자기의 친구들과 공유했습니다. 뉴스에 나온 내용 중에, 정준영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찍은 불법 영상을 친구들과 공유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그래. 나, 쓰레기다.ㅋㅋ’
정준영이 왜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요. 자기가 하는 일이 나쁘다고는 알고 있지만, 그만 둘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원래 ‘쓰레기’라는 것은 쓸모 없는 것을 말하지요. 그래서 이 말을 사람에게 사용하면 아주 나쁜 말이 됩니다. 그렇지만, 정 군으느 다른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은 남들이 못하는 일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레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입니다. ‘쓰레기 같이 살고 있는 나를 경배하라!’라고 것입니다. 저는 기사 내용을 읽으면서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들으셨나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종교적인 느낌이 들지 않나요! 이것이 죄가 가진 묘한 면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로 인해서 수치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한 일을 만족하면서, 떤 성취감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계속해서 짓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은밀하게 지은 죄가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미안하다’면서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봅니다. 지금도 한국 뉴스는 온통 이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는 전 세계의 뉴스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 K-팝의 인기를 이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세계적으로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들통난 죄 때문은 그들의 삶도 망가졌고, 우리 조국도 망신을 당하고 있다는 현실이 슬픕니다.
이렇게 죄가 무서운 것일 줄 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지고, 망신을 당하는지 두 눈으로 똑바로 보면서도 그렇습니다. 또한 그런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정준영이 뉴스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다윗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통해 교훈을 얻으면 조심해야 할텐데, 결국 그렇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이 부분을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양면성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의지도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 의지도 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무조건 사랑하게끔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요된 사랑과 강요된 자유는 진정한 사랑도 아니고, 자유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짓는 것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죄를 반복해서 짓는 두 번째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단 목사님이 다윗에게 해 준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먼저 나단 목사님이 다윗에게 해 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동네에 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요. 하루는 부자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부자가 자기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싶어서, 가난한 사람의 전 재산이자, 딸 같은 존재인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 왕은 매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다윗 왕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재판장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를 해하는 자를 응징하겠다는 멋진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왕의 권한으로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은 악독한 부자에게 최고의 형벌인 사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윗은 진심으로 죄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백성을 아끼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반응하셨을 겁니다.
신문을 통해 정준영 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윗 왕처럼 분노했습니다.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그 중에서 인상 깊은 제목의 기사가 한 편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괴물이 태어났나”라는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의 글을 읽으면서, 기자의 마음 속에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고 있는지, 또한 이런 범죄가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람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옥같은 메세지가 쏟아져 나와도, 제가 예측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너무 비관적일지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정준영이라는 괴물은 또 나타날 것입니다. 밧세바와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던 괴물 같은 다윗도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보면 분노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심이 생기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데, 왜 자꾸만 이렇게 험한 이야기들이 반복될까요? 인간의 양면성도 한 가지 이유지만, 또 다른 이유는 다윗처럼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이야기로 듣기 때문입니다. 정준영 같은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괴물들의 이야기로 듣지,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쁜 이야기들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정의를 부르짖는 다윗은 변했나요? 그렇지 않을까요? 다윗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밧세바와 그의 남편 우리아에게 나쁜 짓을 했지만,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일 뿐입니다. 비록 그가 정의를 부르짖더라도, 자기가 말했던 것과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윗의 이야기는 누구 이야기일까요? 내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 이야기인가요?
성경을 읽으시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은 저 사람이 꼭 읽어야 하는데 ..’라고 말입니다. 또는 설교 시간에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이 설교는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꼭 오늘 안 왔네’ 라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안타까워서 드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들리면, 성경은 읽어도 우리는 아무런 변화도 없고, 우리 마음에는 분노만 쌓일지 모르겠습니다. 불의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가룟 유다를 아시지요? 그는 예수를 팔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팔면서 했던 행동이 있어요. 바로 예수께 입 맞춤하는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인사법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성경에서 가장 역겨운 순간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께 친밀감을 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를 팔기 위한 신호였으니 말입니다. 이런 유다의 생각을 모두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돈 몇 푼 때문에 스승을 판 인간이 가룟유다다. 어떻게 저렇게 악독하고 뻔뻔할 수 있지!’ “저란 인간은 사회에서 영원히 매장시켜야 한다”라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머리를 갈대로 때렸던 사람은 어떤가요? 예수께 침 뱉었던 사람은요? 예수께 가시 면류관을 씌우며 희롱하던 사람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옆에서 온갖 욕을 쏟아붓던 강도는 어떻습니까? 밧세바와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다윗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들을 향해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너무 잔인하고 참 거시기하다. 역겹다’라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수 백번 읽어도 마찬가지 결론입니다. 정의는 잘 알지 모르지만,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2.
이런 다윗 왕의 무릎을 꿇게 만든 말이 있었습니다. 나단 목사님의 한 마디가 였는데요. 그것은 ‘당신이 그 사람이라” 라고 말입니다. 다윗에게 들려주었던 부자 이야기는 사실 다윗의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에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다윗 왕의 이야기로 들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다윗은 비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파렴치하고, 형편없는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음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정말 모릅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른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수시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면서도 말입니다.
송명희 씨가 작사한 ‘우리의 어두운 눈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고, 우리의 캄캄한 마음이 그를 몰랐으며, 우리의 무지한 채찍질로 그를 내리쳤고, 우리의 악독한 혀가 그를 정죄했으며..’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몰라 봤습니까. 또 우리가 언제 주님을 채찍질로 내리쳤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은 로마 군인들이지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됩니다. 반면 송명희 시인의 태도를 주목해 보세요. 그는 자신을 로마 군인들의 모습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처참하고, 어두운 순간에 등장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예수를 둘러싼 로마 군인들이 ‘바로 나 구나’라는 깨달음을 알 수 있는 찬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송명희 씨는 비참한 삶을 살았나요? 아닙니다. 시의 후반부를 보면 그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이 그의 이야기가 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죽였지만, 우리는 그를 죽었지만, 그는 살아나셨고, 우리의 악함을 벗기셨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깨달아 져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두 다 “내 이야기”로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하나님께 선택받는 사람도, 고난 속에 있는 사람도, 병에서 치료 받는 사람의 이야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혹시 주님이 ‘이게 너다’라고 말씀하시는지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므비보셋의 이야기도, 암몬의 이야기도, 다윗의 이야기도,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이야기구나’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그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은 이런 책입니다. 하나님과 내 이야기로 채워진 책이 성경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와 내 이야기로 채워진 책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으면 나오는 이야기들이, 또는 설교를 통해 들려지는 이야기, 신문을 통해 들려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이 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단 목사님을 통해 다윗 왕에게 하신 ‘당신이 그 사람이라’라고 하신 말씀은 다윗을 죽이려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고 살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았고, 회개하고 변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성경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들리게 하시면, 우리가 그것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룟유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가룟 유다의 마음을 다 아시는 에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발을, 그것도 가룟 유다의 발을, 내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싫어하는 내색 없이, 역겨워하지 않으시면서, 화 내지 않으시면서, 가룟 유다의 발을, 내 발을 여러분의 발을 씻으시고 닦아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가룟유다를 성찬식에도 초대하셨습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그에게, 나에게도 나눠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가룟 유다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깨달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나단 목사님의 대한 다윗의 반응입니다. 나단 목사님이 다윗에게 말하지요.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9절)’ 나단 목사님이 다윗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즉시 자신의 잘못을 자복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이런 다윗의 반응은 놀랍지 않지요? 당연한 이야긴가요? 아니에요. 다윗은 왕의 죄를 묻는 선지자를 향해서도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감히 왕인 나에게 죄를 묻다니. 여봐라, 거기 아무도 없나냐. 여기 왕을 능멸한 이 놈을 당장 끌어내 쳐 죽여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 왕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한 예로 헤롯 분봉왕을 들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 왕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그랬던 헤롯이 어떻게 했냐면, 세례 요한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고, 결국 그를 죽였습니다.
다윗이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단 목사님, 아이고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의 체면이 있지.. 그 일은 당신과 나만의 비밀로 합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내가 달게 받을테니. 내 체면 좀 살려주시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의 잘못을 지적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삼상 15:30)’ 자기 체면, 권위가 중요했던 사울 왕과 다윗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에게 여러번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했지만, 불행히도 가룟유다는 이 메세지를 듣고 회개하지 않았으며,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시면서, 또는 누군가의 대화 중에, 어떤 이야기들이 나를 책망하는 말씀으로 들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다윗 왕처럼 반응 하시나요? 아니면 헤롯왕 처럼 또는 사울 왕 처럼 하시나요?
다윗은 즉시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요한 일서의 말씀을 읽는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 1:9,10절)
이 말씀이 다윗에게 임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여러분과 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결론으로 이 찬양을 부르길 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우리의 어두운 눈이’ 라는 찬양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그 처참했던 순간이 나의 사건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찬양입니다. 여러분과 제게도 성경의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로 들리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과 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음을 깨닫고, 주님의 인자 하심이 끝이 없고, 주님의 자비는 무궁해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워지는 은혜가 여러분과 제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