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지금까지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의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에 대해 나누고자 하는데요. 특히 11절에 나오는 ‘사라’라는 인물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이면서, 아브라함과 사촌지간입니다 (창11:29). 가까운 친족끼리 결혼한 셈인데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열국의 어미’라는 뜻을 가진 사라의 원래 이름은 “사래”입니다. 사래는 ‘공주’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주’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예쁘다” 입니다. 실제로, 사래는 이름처럼 무척 예뻤던 같습니다. 얼마나 예뻤냐하면, 사라가 65세 때에도, 애굽 왕이 그 미모에 반했던 일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창 12). 더욱 놀라운 것은, 사라가 89세 때도, 여전히 아름다웠다는 점입니다. 그랄왕 아비말렉 (창 20:2)은 사라의 미모에 반해, 사라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 보낸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는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 127세를 향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 23:1).
요즘에 사람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는 100세 시대가 열렸다’라는 것입니다. 몇 십년 전에 비하면 무척 오래 살게 되면서,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때 고생하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 고생시키지 않다가, 하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로망이 있다면, 100세까지 살더라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실 겁니다. 저도 잘 못하기는 하지만, 부인들이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바로 ‘예쁘다’는 말입니다. 맞나요? 그걸 꼭 말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ㅎㅎ 오늘의 적용!! 다른 사람에게 예쁘다고 하시지 마시고, 남편들은 자기 부인에게 ‘예쁘다, 아름답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90세이 넘는 나이가 되어도,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지 비결을 알려고 연구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결은 안타깝게도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ㅎㅎ
사라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은 사라를 순종의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베드로 전서 3:6“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사라는 아브라함를 주로 칭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자고 하는 일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잘 살고 있던 고향을 떠나 가나안이라는 타향살이를 결정했을 때도, 아브라함이 자기 목숨 부지하겠다고, 자신을 두 번이나 궁지에 몰아 넣었는데도, 사라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사촌 동생인 롯과 아브라함 사이에 재산 분쟁이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롯보다 먼저 좋은 땅을 얻어야 되지 않냐고, 사라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손해 보는 일만 하는 바보같은 남편에게, 사라는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묵상해 보면,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라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할 때마다, 사라가 반대했다면, 아브라함은 부인과 싸우느라 힘든 인생 길을 걸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마찬가지로 사라도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했던 일들을, 사라도 순종하면서 함께 따라 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사라라는 인물은 이런 사람입니다. 사라는 외적인 아름다움 뿐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완벽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질투를 받을 만큼 말입니다.
사라의 아픔, 불임
사람들 눈에 완벽해 보이는 사라에게도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제 결혼했는지 모르지만, 사라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미워한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의 아름다움에 반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결혼하고, 수 십년이 흘렀지만,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아이 소식이 없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한국의 경우 결혼한 7쌍 중 1쌍이 불임으로 고생한다고 합니다. 어떤 기사에 보니까, 불임 환자가 겪는 심리적 고통이 암 환자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설마, 내가’하는 부인단계, ‘나쁜 짓도 안했는데, 내가 왜?’하는 격노 단계, 어디에 매달려도 소용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우울 단계 등을 두루 경험한다고 합니다. 남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는데요. ‘나보다 더 젊은 신부를 만났더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텐데”하는 마음입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인공 수정을 통해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그래도, 아이를 갖는 것은 매우 힘들고 돈도 많이 들어갑니다.
이들 불임 가정에게 비수 같은 말이 있다고 하는데요. 위로한답시고 무심코 던진 말들이라고 합니다. ‘무자식이 상팔자야!” “맘 편하게 먹어!” “입양하는게 어때?” 같은 말들인데,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꽃힌다고 합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에게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아픔이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에게 미안했을 것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순종하는 여인으로 살았던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자꾸만 흘러도, 이들 부부가 기다리던 아이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래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건강했지만,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스트레스에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고향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중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귀가 번쩍 뜨일 대목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가정에게, 하나님께서 아이가 생길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 명도 감사한데,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뭐라고 이야기 했을까요? “아멘!”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보다 “더 크게” 아멘을 했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라입니다. 아이 없어 우울한 여인에게, 하나님이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과 사라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던 것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삶에 어려움이 닥쳐와도, 힘든 일이 생겨도, 위험이 닥쳐와도, 사라와 아브라함은 이겨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들 부부가 생각했던 것처럼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 부부가 낙담할 때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을 것이다. 하늘의 별과 같이 셀수 없이 많은 자손을 네게 주겠다 (창 13:16, 15:5)”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어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년, 이년, 오년, 그리고 십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은 85세가 되었고, 사라는 75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10년이란 세월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300년보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12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을 시간입니다. 특히 사라에게 그랬습니다. 사라는 여호와 약속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자기 여종인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창 16:1,2).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가지고 싶은 여인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보다 확실해 진 것이 있었지요.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식이 없었던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라 사라 때문이었다는 것. 하갈을 통해 원하는 자식을 얻었지만, 사라는 우울한 날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무려 13년이라는 우울하고 힘든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었고,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많이 늙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래는 생리가 끊겼습니다.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25년 전의 약속이 이룰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창 17,18장).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웃었습니다. 사라도 마음 속으로 웃었습니다. 하나님을 비웃었다기 보다는, 멋쩍어서 웃는 웃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너무 늦었어요. 인간적으로 아무리 예를 써도 안됩니다. 늙었단 말입니다.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멋쩍어서 아브라함이 웃었을 겁니다. 사라도 멋쩍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주책맞게 이 나이에 아이라니요?” 하지만, 수 십년을 거듭해서 약속만 하시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단호하셨습니다 “사라가 낳은 아이, 이삭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라의 몸에 생긴 변화
여자들만 알고, 남자들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임신입니다. 나를 닮은 생명체가 내 몸에서 자라고 있다는 신비로움. 참 신기롭고,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의 작은 발이 엄마의 배에 희미하게 보일 때는, 아빠가 봐도 참으로 신기하기 그지 없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너란 존재와 만날 수 있다”라는 기대 때문에, 온 식구들이 들뜨게 됩니다.
사라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처럼,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불러오고, 걸어다니기도 숨이 차고 힘이 듭니다. 아이를 임신한 9개월 동안, 사라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늙어서 주책이라고 창피해서 숨어 있었을까요? 아니면, 불러오는 배를 보면서, 매일 매일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았을까요? 사라에게 있었던 우울했던 지난 날들의 기억들이, 눈 녹듯이 녹아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는, 오직 태어날 아이 생각에 매일 매일이 즐거웠을 것입니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얻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라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난 이유를 믿음에서 찾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히 11:11)” 사라가 무엇을 믿었나요?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비록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는,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웃었지만, 하나님이 단호하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가 마음의 태도를 바꿨습니다. 자신의 현실을 보고 낙담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내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비록 사라는 나이도 많고, 생리도 멈췄습니다. 인간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웃음 밖에 나오질 않았습니다. 낙담할 수 밖에 없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 사라는 거기서 멈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의 태도를 바꿨습니다. 내 몸은 비록 늙어서 단산하였지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것을 고백하고 믿었을 때, 사라의 삶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어떤 기적인가요? 그의 절망이 희망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오래된 슬픔이 기쁨으로 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재 같이 죽은 인생이 생명을 낳는 살아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미쁘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생긴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메세지가 있지요. 하나님은 한 번도 약속하신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라도 거의 포기할 뻔했습니다. 사라는 자신이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인 아브라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제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어떤 기대도 없습니다. 수 십년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이제는 지쳐 버렸습니다. 사라가 거의 포기 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무엇을 보았을까요? 사라는, 하나님은 한 번도 약속하신 것을 포기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라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에게는 힘이 없지만, 하나님이 힘 주시면 가능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 낙담되는 일이 있습니다. 남편으로, 아내로, 아버지로, 또는 선생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생활도 포기하고 싶고, 직장 생활도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로 산다는 것이 힘들고 낙담될 때가 있습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돼서 낙담될 때가 있습니다. 집안도 형편없고, 나도 형편없고,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어서 낙담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내려 놓고 싶은 유혹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순간을 잘 견뎌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가 우리 스스로 가치 없다고 여길 때,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라처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는 조금 힘들다고, 낙담되었다고 쉽게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꿈이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가정이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교회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직장이라면, 낙담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견디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꿈과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라의 인생에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반전이 있을 것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세기 21장 6-7절입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사라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내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라가 동네 방네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내가” 라고 하면서 자랑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내가 낳았어요! 늙어서 주책이라고 말해도, 상관없어요. 당신들이 그동안, 내 속이 어떠했는지 알기나 하시나요? 나는 기쁘고, 나는 기쁘다”는 사라의 고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사라에게 이런 기쁨이 찾아온 것은, 그에게 있었던 믿음 때문입니다. 자기의 처지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았던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신실하신 주
최용덕 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낮해달밤” 이라는 잡지도 만드셨고, 잘 알려진 찬양 곡도 여러편 쓰시는 분이 있습니다. “낮에 해처럼 밤에 달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라는 찬양을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방금 불렀던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이라는 곳은 최 용덕 님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1절: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2절: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미친 것 전혀 없네’
후렴: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최 용덕 님이 고백하고 있는, “지나 온 모든 세월들” 속에는 2001년에서 2007년까지의 약 6년간의 시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분에게 이 시간은 괴로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분의 딸 로아가 뇌 종양으로 암 투병을 하다가 16살때 천국에 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티끌 하나도 하나님의 주제 아래에 움직인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딸 로아를 천국에 먼저 보낸 아빠 최용덕님의 찬양입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다고, 지난 온 모든 세월 돌아봐도, 하나님의 손길이 안 미친 것이 전혀 없다”라고 말입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어쩌면 낙담할 수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낙담이 될 때나, 괴로울 때나, 하나님의 신실하시다는 것을 그가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비록 딸을 먼저 하늘 나라로 보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의 믿음의 고백이, 그를 살렸습니다. 절망스러운 삶의 현실을 이겨냈고, 또한, 천국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내 딸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든, 하늘에서 살든,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 평화 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절대 평화가 임합니다. 그런 평화가 여러분과 저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실 일들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사라처럼, 이삭을 낳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최 용덕 님처럼, 절대 평화 속에 거하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낙담된다고, 쉽게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붙잡고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 믿음을 붙잡고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헤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