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삽시다!’ 아마 오랜만에 들어보셨을 말이 아닐까 합니다. 아마 여러분이 어릴 때, 많이 들으셨던 말이었을 겁니다. 어릴 적에 봤던 많은 영화도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듣기 어려운 말이 되었습니다. 아니 하기 힘든 말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착하게 삽시다’라고 말입니다. 착하게 살 마음이 있냐고 스스로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직업상(?) 착하게 살아야겠지요. 목사는. 아니, 목사라도 착하게 살아야 할까요?!
요즘 세상은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말이 도전을 받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 ‘착한 사람은 어리석다’ ‘착한 사람은 남의 밥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말이 격하게 공감이 되는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아라’라는 말 대신에 ‘성공해라. 돈 많이 벌어라. 출세해라. 권력을 가져라’ 이렇게 가르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지혜롭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현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야기 기차] 라는 동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한 부인이 아이 셋을 데리고 기차를 탔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떠들자, 부인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착한 아이가 착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좀 지루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아저씨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에 엄청나게 착한 아이가 살았어. 심하게 착한 소녀는 너무나도 착해서 '말 잘 듣는 상, 공부 잘하는 상, 바른생활 상' 이라는 메달을 세 개나 받았단다” 그리고 소녀가 굉장히 착하다는 이야기를 그 나라의 왕자도 듣게 되었지. 왕자는 소녀를 기특하게 여겨 궁전으로 초대했단다. 궁전 정원에 들어간 소녀는 너무 행복했데. 착하기 때문에 궁전에 초대되었고, 이렇게 멋진 정원에서 신기한 동물들과 나무들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때 늑대가 정원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데. 늑대를 본 소녀는 겁에 질려 수풀로 숨었어. 그리고 소녀는 엄청나게 후회를 하게 되죠. '내가 특별히 착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라고 말이야. 다행히 늑대는 소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어. 하지만 그때 소녀가 받은 세 개의 메달이 부딪히며 찰강찰강 소리를 낸 거야. 늑대는 그 소리를 듣고, 바로 발길을 돌려 소녀를 덮치고 말았어. (출처:[먼.산.바.라.기.])
착하게 살아서 복 받을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착하게 살다가 늑대 먹이가 되었다 라는 이야기 입니다. 따라서 너무 착하게 이 땅을 살아도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착하게 살자’ 라는 말이 조롱의 대상이 되어가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던 사람들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후회하듯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착하게 살지 말 걸’ 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들으면 슬프기도 합니다.
착함이 존경 받지 못하고, 나쁨이 존경 받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입니다. 그래서 ‘착함을 버리고 나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현명하고, 지혜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선택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착함이 잊혀지는 세상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교회도 착함을 버리고 세상이 말하는 것을 쫒으며 살아가야 할까요?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지혜를 따라서 교회인 우리도 살아야 될까요? 교회는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맞지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교회는 적어도 ‘착하게 삽시다’라고 외쳐야 하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해야 하는 곳입니다.
‘착하게 삽시다!’ 이 말이 어리석이 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착하게 삽시다!’ 이런 말이 가치가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하버드 대학에 마이클 샐덴이라는 정치철학자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책의 시작이 이렇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자꾸만 돈으로 사려고 하는 세상은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돈으로 집을 살 수 있어도 돈으로 가정을 살 수 없다. 돈으로 시계는 살 수 있지만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돈으로 잠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지만 돈으로 지식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의사는 살 수 있지만 돈으로 건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직위는 살 수 있지만 돈으로 존경은 살 수 없다. 돈으로 피는 살 수 있지만 돈으로 생명은 살 수 없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착함과 신앙도 그런 가치 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착함을 버리면,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착함을 버리면, 세상이 썩어져 가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3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경에는 “착하게 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공동 번역으로 읽어드릴께요.
나쁜 일 하다가 쓰러지면 끝장이 나지만 착하게 살면 집안이 흥한다 (잠 12:7).
착하게 살면 화를 입지 않지만 나쁜 짓 하면 재앙을 면하지 못한다 (잠 12:21).
착하게 살면 생명에 이르고 그릇된 길을 가면 죽음에 이른다 (잠 12:28).
착하게 살면 배고픈 줄 모르지만 악하게 살면 배를 곯는다 (잠언 13:25).
정직하게 착하게 살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 (잠 20:7).
착하게 사는 자는 땅을 차지하고 언제까지나 거기에서 살리라 (시 37:29).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들은 착하게 살면 인생의 끝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착하게 살면 우리 후손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되는 이유이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착함’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 동안 착하게 살다가 마음이 힘드신 분들이 있다면 위로가 되는 말씀이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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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바나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바나바 라는 사람이 내심 부러웠습니다. 나도 이런 평가를 받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다! “ 초대 교회 사람들이 모두 다, 바나바를 이렇게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바나바를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다’ 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나바는 착해! 라고 인정하셨습니다. 바나바 대신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사람은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입니다.
사도행전에 바나바에 대한 기록이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바나바 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 4:36). 그리고 바나바는 자신의 이름대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았습니다.
초대 교회가 어려울 때, 자신의 밭을 팔아 교회를 도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에 대한 신앙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물심양면 도와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를 믿고 도리어 예수를 전하고 다녔지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사울의 회심을 쉽게 믿지 못했습니다. 그 때 사울의 말을 믿고, 초대 교회에 소개해 준 사람이 바나바 입니다. 바나바는 사람들 사이를 화목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던 것이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적은 수의 이방인이 아니라 많은 수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에 성도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는 400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먼 곳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바나바의 모습에서는 어떤 편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를 안디옥에 사도들이 파송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나바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가 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나바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영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라’라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는 착한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런 바나바로 인해 그곳에 믿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늘어나자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바나바를 파송한 곳은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따라서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도울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25절에 보면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는 모습을 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나중에 보시겠지만 바나바와 사울은 스타일이 영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같이 일하기에는 불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갔고, 그와 함께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간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 안디옥 교회가 질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기록이, 안디옥 교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현대의 교회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몇 명 늘어나면,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지도자를 데리고 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지도자를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열심히 일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온 이유는 그가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삶의 목적이 교인의 ‘숫자 증가’에 있지 않고, 인디옥에 있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있었다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삶의 목적도 착함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의 삶의 목적은 성품과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다. 이 말은 그가 어릴 때부터 착한 사람이었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착하다는 것은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그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주님 안에서 더욱 착해졌다는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깊어 질수록 더욱 착하졌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바나바 입니다. 그런 사람이 여러분이기를 또한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또한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품과 신앙. 이 두 가지는 정말 중요한 가치 입니다. 현대 교회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가치인 것입니다. 즉 좋은 성품과 신앙이 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합니다. 좋은 성품과 신앙심이 깊은 지도자가 이 땅에는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착하게 삽시다. 이번 주에는 어떤 착한 일을 해 보실래요.
“양보도 해보세요. 격려의 말도 해 보세요. 최고라고 격려해 보세요. 힘내라고 응원해 보세요. 따뜻한 말을 해 주세요. 사랑한다고 해 보세요. 미안하다고 하시고, 또한 용개를 내라고도 말씀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이번 주도, 여러분과 제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성품과 깊은 신앙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하셨으면 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세요. 주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착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이 되기를 바랍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좋은 옷를 입지 못해도, 좋은 차를 타지 못해도, 내가 살아온 인생이 착하게 살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자랑이 되고, 우리의 면류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인 여러분과 제가 착하게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변합니다. 세상이 불공평하더라도, 교회는 착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논리로, 세상의 가르침이 아닌,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고 외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착하게 사실 의지가 있으신가요? 의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지는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려는 방향으로 몸을 틀고 앞으로 향해 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나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응원해 주십니다.
바나바는 착하고, 믿음과 성령에 충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착하게 사는 것이 조롱 받지만, 그래도 교회는 착함을 버리면 안됩니다. 주님이 선하게 살라고 말씀하셨기 때분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원한다면, 공평한 세상을 원한다면,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신다면, 교회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 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면서 이루어야 할 목표입니다.
‘착하게 삽시다. 또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게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