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즘에 읽고 있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모티브는 이렇습니다. ‘만약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고, 주인공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으세요? 잘 보이던 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게 되면 말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많이 당황할 것이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더욱 처참한 상황에 처하는데요. 왜냐하면 눈이 먼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들도 똑같이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는 이유로 갑자기 눈이 먼 사람들은 시설에 격리됩니다.
그래서 좁은 시설에 수 백명이 모여 살게 되었는데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서로의 고통을 참아주고 예의도 갖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볼 수 없게 되면서 깨닫기 시작한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에 익숙해지자, 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아무 곳에나 배설을 하게 됩니다 (죄송해요.. 아침부터). 사람들이 화장실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귀찮기도 하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니까. 그러면서.. 그래서 그들이 머무는 시설에는 온통 똥 냄새로 진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더럽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방법도 없고 무엇보다도 익숙해져 갔습니다. 더러운 것도 익숙해지면 살만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옆에 누가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남이 나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부끄러움도 사라지게 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소설은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실날하게 묘사합니다.
2.
소설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내용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어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본능에 너무 충실했던 한 사람”의 모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 사람. 수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 그런 다윗이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다윗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다윗은 성숙했고,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윗이 추락하는 사건은,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실망감과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현대로 따지면, 대형 교회 목사가 성도 중 한 명과 불륜을 저지른 사건과 같다고 할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봄이 되면 왕들은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래서 다윗도 전쟁터에 나가야 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었습니다.
다윗이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왕궁의 지붕 위를 거닐었습니다. 평화로운 시간들이고, 여유 만점이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의 눈에 한 여자가 목욕하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눈에 이 여자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다윗이 있는 곳과 여자가 있는 곳의 거리가 상당히 있었을텐데, 어떻게 여인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미 다윗의 마음에 유혹이 찾아와서 다윗의 눈을 바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눈에만 이 여인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종을 불려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종은 다윗이 본 여인은 밧세바이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충성된 부하였는데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도 다윗은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서 밧세바를 데리고 오게 했고, 그 날 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윗은 밧세바를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을텐데, 한 달 후에 밧세바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다윗에게 전해 오게 되면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한 일을 숨기기 위해,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궁으로 불러 들입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아가 밧세바와 동침하게 되면, 밧세바가 낳을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모르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이런 의도와는 달리, 우리아는 아내와 동침을 하지 않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자 다윗은 요압 장군을 통해 그가 전쟁터에서 교묘하게 죽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사무엘하 11장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눈먼 자들의 도시’의 내용들이 생각났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윗이 눈이 먼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무엇보다도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다윗은 눈만 먼 것이 아니라 귀도 막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궁을 거닐다가 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 장면에서 다윗의 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라고 말입니다.
임자 있는 몸이예요. 그것도 충성된 부하의 아내랍니다! 라고 부하들이 말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부하들의 말을 알아들어야 되는데, 이에 상관하지 않고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드렸습니다. 다윗이 ‘나쁜 왕들의 선례를 좇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냐 하면, ‘다윗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다윗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눈에 아름다워 보였던 밧세바이었지만,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려오기 전까지, 한 번도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하룻밤 욕망을 채우는 존재로만 밧세바를 본 것이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전염성도 매우 강합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패턴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래서 지루합니다. 잠시 동안은 쾌감을 주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는 더욱 강력한 것을 찾게 됩니다. 죄는 결국 가장 강력한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가 언론을 통해 보는 죄의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봄이 되면 왕은 전쟁터에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궁에 남았습니다. 즉 다윗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신 그는 잠을 잤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가지 않아도 되는 전쟁이라고 여기거나, 시시한 싸움터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이렇게 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목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장로가 있어야 할 자리, 집사가 있어야 할 자리,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생기는 일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살 만 해지고, 시간이 많아지면 타락해 버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하고 말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요? 술집은 아닐 것 같아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기도의 자리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의 자리에 있으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봄이 되었으니 우리 마음 밭에도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야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의 씨를 여러분의 밭에 뿌려보세요. 이것이 농부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수 백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이것이 오늘 본문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뛰어난 영성을 가진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선생이고, 왕이고, 목사고, 부모이고, 이웃이라고 할찌라도, 밧세바와 그의 남편에게 저지른 행동을 보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죄가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는 많은 것을 파괴했습니다. 죄는 우리의 인생을 망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저지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말씀은 충격으로 들려야 합니다. ‘의인이 없다. 그것도 하나도 없다는 말씀도 우리에게 충격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이 믿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내가 의인인데..” 라는 말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의인이라고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죄인은 아닌데 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죄인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라 죄를 짓는 것이라고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가 말합니다. 저도 이 말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보십니요. 하나님의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다윗의 본성을 어떠한지를 보았습니다. “신이 되려고 하는 자,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려고 하는 자”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다윗의 모습은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눈이 멀었다고, 다른 사람들의 눈도 모두 멀었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라고 말했습니다. 죄인 중에 왕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우리가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왕이 되고 싶어하는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한 도시라고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의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불러준 롯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도 엉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통틀어서 의인을 찾아볼 수 없고, 모두 다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땅에 의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없다’는 말이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렌디 알콘의 ‘악의 문제 바로 알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웨슬리 앨런 도드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자 아이 세 명을 고문하고 추행하다가 살해한 사람입니다. 1993년 1월 4일 자정 직후 미국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웨슬리가 죽기 30분전 12개 방송사에서 상황을 생중계 했습니다. 그 때 언론을 통해 발표된 웨슬리의 마지막 말을 듣고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소망과 평안이 없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소망과 평안을 찾았습니다” 객석에서 분노에 찬 신음 소리와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천하의 살인마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니 정의의 심판을 보러 온 군중은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여러분도 충격에 빠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랜디 알콘 목사도 충격에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고 그가 고백했습니다. ‘나도 그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웨슬리와 내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 우리 둘의 차이는 미미했다”라고 그가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내가 웨슬리고, 빈라덴이고 히틀러다! 라고 그가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악한 행동을 보면,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교만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저런 상황이 되면 다윗처럼 행동합니다.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다윗의 모습을 보세요. 그는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서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부하를 너무나도 끔찍하게 생각하는 왕의 모습으로 자신의 더러움을 포장한 것이지요. 우리 안에도 친절과 도덕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다윗의 모습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예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우리는 오히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은, 죄에 대해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있게 깨닫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도, 자신도 죄를 계속해서 짓고자 하는 악학 본성이 남아 있다는 자각이면서, ‘나는 내 죄의 깊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C. 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심지어 이방인들의 마음 속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도 싸다는 진정한 자각이 있었다.. 자신의 병을 아는 사람에게 복음은 치유의 가능성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따라서 죄의 의미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악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라는 특권의식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의롭다 라는 특권의식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도토리 키재기 라는합니다. 빈 라덴이나 히틀러보다 착하지만,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물에 빠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물에 빠져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그 사실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요즘에도 우리는 언론 매체를 통해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기 앞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줘야 합니다. ‘다음은 내 차례인지도 몰라’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소서” 라고 말입니다.
다윗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종들이 보고 있었고, 요압 장군이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있구나” 라고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다윗만 몰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하나님이 이 일을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사라마구의 소설처럼, ‘눈먼 자들의 도시’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못 볼 수 있다는 인식, 오히려 다른 사람의 눈은 열려 있다는 인식,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는 인식이 매우 중요함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만” 이라는 찬양입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 주님만 가득했을 때, 그는 주의 종으로, 생명을 살리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에 자기로 가득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내 마음 속에 주님만 가득하게 해 달라고, 내 모든 생각에 주님이 가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불렀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 같은 죄인이 가야할 곳은 주의 은혜의 강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가서 갈한 우리의 영혼이 생수로 가득채우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기실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