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 동안 집 공사를 했습니다. 집에서 낡은 것은 교체하고, 집 안 일부를 페인트 칠을 했을 했습니다. 집 구석 구석 숨겨져 있던 물건들도 꺼내서 정리했습니다. 옛날에 쓰던 물건이나 사진을 보면서 옛날 추억에 잠겨 보기도 했습니다. 집 공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제가 가진 것이 참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언제 다 산 건진는 모르지만, 그것들 중에는 사서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소중하고 가치 있었던 것들이 지금은 그냥 그런 것들이 된 것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가치 있는 물건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앞으로 필요한 것들과 중요한 것들을 고르고 필요 없는 것들은 정리했습니다.
집 안 공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 곳을 고치면 다른 곳이 마음에 안들어서 고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일이 끊임이 없다는 말이 실감이 되었습니다. 교회 페인트할 때도 느낀 거지만, 한 쪽을 페인트 칠하면 페인트 칠을 안 한 곳과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지저분하다 정도였는데, 한 쪽이 너무 깨끗하니까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으로 나름 깨끗한 줄 알았는데, 새로 페인트를 칠하자 지저분하다는 것이 더 분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손 때 묻은 것도 보이고 페인트 벗겨진 것도 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페인트를 칠하다보면, 건물 전체를 다 칠할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에 집 공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몸으로 체험한 것은 깨끗한 것 옆에 있으면 더럽고 지저분한 것이 더 선명해진다는 것입니다.
2.
집 공사를 하면서 떠 올랐던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장에서 서 있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페인트를 칠하면서 별 생각을 다 하지요? 제가 별의 별 생각을 다 합니다.
페인트를 칠을 하다가 주님 앞에서 저의 모습은 어떨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난 시간 주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신다는 내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 것 같아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여러분의 모습 말입니다. 이 세상 끝에는 주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2절을 보면 주님의 심판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로마서 2장은 ‘판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주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에 대해 열거하면서 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이루어지지만, 사람의 판단은 자기 편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남들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사례들은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본 목양 연가라는 글의 일부 입니다.
‘… 남이 손바닥만한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 경건치 못하기 때문이고, 내가 작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활동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남이 타협하면 야합이고 내가 타협하면 양보이다. 남이 예배 시간에 늦으면 '5분만 일찍 출발하지.' 내가 늦으면 '설교가 중요하지...” 남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 “벌써?” 내가 직분을 받으면 “이제야…” 남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마 8:20). 내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네 지경(地境)을 넓히리니”(출 34:24). 남이 교회에 올 때 화장을 하고 오면 사치하기 때문이고, 내가 교회에 갈 때 정성 들여 화장을 하는 것은 최소한의 에티켓이 아니겠어? 남이 예배시간에 졸면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 22:46)는 말씀이 생각나고, 내가 졸면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이렇게 사람들의 판단은 자기 중심적이고, 공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진리대로’이루어지는 공정한 것입니다.
두번째, 주님의 심판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우리의 은밀한 까지도 판단하십니다. 로마서 2장 16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은밀한 것을 보시며 판단하십니다.
집 안 페인트 칠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그 날에,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그리고 아마 이런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는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우리의 모습이 더욱 분명하게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페인트 칠한 부분과 안 칠한 부분이 확연히 구별되듯이 주님 앞에 우리가 서면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판단하시는 분 앞에 설 때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괜찮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주님 앞에 서면 세상의 때가 묻어 있어서 지저분해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다 생각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았지만,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에 남아 있는 죄의 흔적들이 주님 앞에서 다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죄라는 녀석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우리를 구속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별 것 아닌 죄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몸에 난 상처가 흥터를 남기듯이, 죄도 우리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자신의 형제인 요셉을 노예로 팔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요셉은 사랑받던 아이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살았고 나중에 국무총리가 된 것은 성경에 잘 나와 있는데,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들은 목축을 하면서 평범하게 살았던 것 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요셉을 팔아 버린 것과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요셉을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자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벌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2:21-22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야곱의 아들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의 흔적들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났을 때도 이런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우리의 마음과 몸에 기억되어 있는 죄의 흔적으로 주님 앞에서 떨고 있을지 모릅니다.
4.
주님의 선지자들도 영광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이 두려워하면 했던 고백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영광의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정하고, 죄인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5절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서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여더라’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부정하다’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깨끗하신 분 앞에 있으니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이 다 들어나는 것을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우리가 정직하게 살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더렵다고 했던 사람들, 우리가 부정하다고 했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더 부끄러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외모로 판단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아시는 주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우리가 에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 죄악을 깨끗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런데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목적은 뭘까요? 사람의 판단은 망하게 있고,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살리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래 참으시는 이유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하나님이 악인의 형통함을 바로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조차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놀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저부터 아마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례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은 모든 이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심판과 주님의 심판이 다른 것은 기준입니다 .주님의 심판은 기준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3:17,18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주님의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심판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일까요? 우리의 인생역은 바로 주님의 심판대 입니다. 주님의 심판대에 선다는 것은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나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의 장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종착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야 할지 안다면 우리가 시간 낭비하면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야할 바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주님이 보여주시는 그 길을 걸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