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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행 10:39,40)
1.
오늘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친척을 대상으로 했던 설교 내용 중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셔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증언은, 그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전해 주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았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복음이라 부릅니다. 이 복음이 기독교의 핵심이며,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복음으로, 우리 모두가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수 만번 들어도,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려지는 말씀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꿔 놓는 말씀이라 그렇습니다. 또한 이 복음은 우리가 세상 끝날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살리신 이 복음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오늘 선포되는 복음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가 주님의 복음으로 인해, 평안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위기감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들이 매일 들리고 있는데요. 생각날 때마다, 지속적으로 전 세계 사람들 뿐 아니라, 이 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 이 시기를 통해서, 우리 믿음이 주님 안에서 더욱 자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사람이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믿나이다.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세요” 우리도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뉴스를 보실 텐데요. 뉴스를 보다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수치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사람들은 수치 스럽게 사는 것을 죽는 것 이상으로 싫어합니다. 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화장실 휴지’ 사기라는 분석입니다. 처음에는 잘못된 소문 때문도 사람들이 휴지를 샀는데요. 화장실 휴지를 사재기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수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번 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게 많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 동안 항상 풍성해서 몰랐는데, 이번 일로 ‘휴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인간으로서, 문화인으로, 교양인으로. 품위를 지키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휴지’입니다. 며칠이라도 밥은 못 먹어도 됩니다. 아니 조금 덜 먹어도 되는데요. 심각한 것은 밥을 먹으면 어김없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 배변 문제인데요. 예전에 소개해 드린 ‘눈 먼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을 읽고 있으면, 온 세상이 그 냄새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수치심을 잃으면 인간다움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소설인 듯 합니다.
수치심이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하는데요. 많은 경우 수치심은 부정적인 면이 강합니다.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수치를 주고,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소개하면, 사무엘상 3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울 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사울 왕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배경에 수치심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있었는데요. 사울 왕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도망가다가 부상을 입게 됩니다. 그 때 사울왕이 병기든 사람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적에게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면서 죽는 것보다, 부하에게 죽는게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하가 머뭇거리지요. 그러자 사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수치스럽게 죽는니 자결하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수치스럽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보여줍니다.
수치심은 그 동안 이룬 모든 업적도 사라지게 만듭니다. 수치심은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인간 관계도 파괴합니다. 수치심은 기쁨과 사라지게 합니다. 수치심은 은밀하게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흔히 일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죽음마저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던 시기에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은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는 순간 일어나는 일들은, 그가 살아오면서 이룬 모든 업적과 능력이 부정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권세가 기름 붓어지던 예수. 온 곳을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했던 예수. 마귀에 짓눌려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셨던 예수. 이런 예수의 모든 것이 나무 위에서 부정되고 저주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이 일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을 소개하면서 이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모욕을 주고, 수치를 주면서 예수를 죽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는 것을 말이지요. 수치스럽게 죽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수치를 당했으나 수치를 당치 않으셨음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수치를 당하신 주님은 수치를 당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기쁨이 빼앗기고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을 위로하시길 원하십니다.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새롭게 들어야 하는 복음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었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도 다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부활 신앙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수치를 당하신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이 배우셔야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바로 ‘순종하기’ 입니다.
히브리서 5장 8-9절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기 원하시는 것도 ‘순종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믿음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베드로가 보았고 경험했던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됩니다.
3.
제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잘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열심히 사셨습니다. 믿음대로 사신 것입니다.물론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부자’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잘 사는 사람이다 라는 인식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성실하게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 때 당시 교회에서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습니다.” 건강의 복, 재물의 복, 영생의 복을 받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었던 그 당시,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간증도 말씀대로 살았더니 복 받았다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주일에 공부 안하고 온전히 예배 드렸는데, 좋은 대학에 갔다는 것이 간증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 드리느라 공부 못해서, 대학 떨어진 사람들은 죄인이 되곤 했던 시기였습니다. 말씀대로 살다가 실패한 이야기 하는 것이 두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 있어요. 예수 믿으면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런 복을 받기 보다는 욕 먹고 핍박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이득을 얻는 것보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어떤 분이 음식 장사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은 식당에서 음식을 팔 때, 음식 재료의 원산지를 표시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그 분이 식당을 시작하실 때는 그럴 의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값싼 수입품으로 음식을 만들면서도 값비싼 국산으로 만들었다면서 속이던 시대였습니다. 많은 사람의 조언도 속여서 팔아야 남는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기독교인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서, 국산만을 고집하셨다고 합니다. 국산으로 만들어야 맛도 좋고, 또한 정직하게 장사하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라면서 말이지요. 이렇게 고운 마음씨를 가지신 분은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손님들이 정말 많이 오셨다고 해요. 맛도 좋고, 가격도 싸니, 손님들이 안 몰리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 분이 2년 정도 장사하다가 쫄딱 망했다고 합니다. 마진이 거의 남지 않아서, 팔수록 손해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더니, 망하더라”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수치를 당하신 것이지요. 수치스럽게 죽은 것이지요. 말씀대로 살면 손해 봅니다. 믿음대로 살면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통해 배우는 게 있는데요. 그게 바로 ‘순종하기’입니다.
제자들이 말씀대로 살아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산산히 흩어져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지요. 기독교 역사가 끝나지 않습니다. 모이던 교회가 흩어졌는데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전 세계로 퍼저 나갔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들은 분명 죽었습니다. 말씀대로 하다가 망했습니다. 믿음대로 하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세요. 그는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성실했는지 주인에게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인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그의 결국은 모함을 받고, 수치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것처럼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다시 그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셔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역사의 한 장면이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대로 살면 망합니다.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독교에서는 살리시는 하나님을 잘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결심합니다. 믿음대로 살아야 보겠다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찾아오면 죽을까봐 너무 놀라서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이게 아닌가? 뭐가 잘 못 된 건가?” “아이고, 큰 일 날뻔 했네” 하면서 죽으러 하지 않습니다.
망할 것 같으면 말씀대로 사는 것을 버리고 원래대로, 사람들이 주는 지혜대로 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살다가, 고난을 당하면, 수치를 당하면, 모욕을 당하면, 망하면, 우리는 살 길을 찾아 떠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여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나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는 것입니다.
어느 날 성 마카리우스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가 ‘오늘 밤에 공동 묘지에 가서 무덤을 향해, ‘이 나쁜 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 놈들아, 이 천하고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다 하고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성자가 물었습니다. ‘어떠하더냐?’ 제자가 ‘아무 반응이 없던데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그러면 내일 아침 다시 가서 이번에는 ‘아 훌륭하고 위대하신 분이여’라면서 칭찬하고 돌아오너라’라고 말했다고 해요. 제자가 아침에 다시 묘지에 가서 무덤들을 향하여 칭찬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떠하더냐?’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성 마카리우스가 비로서 말했습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유기성,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행복한 동행 중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마음에 영접할 때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죽어야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수치를 당하고 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대로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가난하게 살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으나,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한국에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이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났습니다. 신천지를 다니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명에 들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 안에 들어야 영생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의 시작이 어디인지 말입니다. 그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고, 죽음을 맛본 후에 경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입니다. 마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생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이 영생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예수의 보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았는데 부활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려면, 하나님의 다시 살리심을 경험하려면, 반드시 우리 자아가, 우리의 옛 모습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할 수 있습니다.
죽어야 삽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기독교 정신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성깔이 죽으면, 내 욕심이 죽으면, 가정이 살아납니다. 이것은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고집이 죽으면, 내 교만이 죽으면 직장이 살아납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아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미 십자가에 죽으나, 하나님이 내 안에 다시 살아나심을 우리가 경험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시기입니다.
5.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두려움과 놀라움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시려고 하는지, 알지 못했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2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이미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가게 되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그래서 위험하고, 두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주님이 앞장 서서 가십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더 놀라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내용이 이것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막 10:33,34)’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앞장 서서 가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도 모이기 힘쓰던 모습에서, 흩어지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려운 시기입니다. 교회가 죽은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망한 것 같지만, 죽은 것 같지만, 아니 죽었지만,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들어야 할 복음입니다.
(찬양)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대로 살다가 망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다가 망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