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과 12월은 여러 가지 행사가 많습니다. 추수감사절도 있고, 크리스마스도 있고, 송년회도 있습니다. 이런 행사들이 차질없이 잘 준비되고 치뤄지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올해도 수고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집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청소해야 되는데.. 아~~’ 무슨 음식을 준비하지, 어떻게 하지 온갖 염려와 생각들이 가득할 것입니다.
마르다의 집에 찾아오신 예수님과 12제자들. 이들을 맞이하는 마르다의 모습과 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13명의 어른들을 대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참 바쁩니다. 한 명의 일손이 절실한 이 때에, 마르다의 마음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 였습니다.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철딱서니 없이 언니는 안 도와주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앉아 있는 모습에, 마르다는 그만 화가 나 버렸습니다. ‘나는 바빠 죽겠는데, 어떤 xx는 한가롭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앉아 있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스쳐가자, 마르다에게는 예수님이 원망스러워졌습니다. ‘마리아는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그냥 내비려 두시나~ 마리아에게 일어나서 언니 좀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셔야지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바쁜 시간에 한가롭게 여유를 부리고 있는 듯한 동생도 미워지고, 그런 동생에게 언니 도와주라고 한 마디 안해 주시는 예수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0장 40절 말씀이지요.
“주님, 저 혼자 이 모든 접대를 하는데 제 동생이 저를 거들지 않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마르다가 강한 어조로 말했겠지요. 예수님이 깨닫도록 말입니다.
이런 장면은 가정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누군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의 모습을 보면, 마르다와 같은 생각이 들수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불 같이 화를 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지만, 얼굴은 불그락 푸르락 했겠지요.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이 10장 41절과 42절에 나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그 좋은 쪽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르다에 대한 예수님의 애정을 여러분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지금 마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마리아의 편을 들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을 두고 이렇게 적용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고 말입니다. 맞는 말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초대한 손님의 음식은 누가 준비하나요? 아무도 안하면 다 굶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예수님이 마리아의 편을 드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행위를 비교하면서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둘 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마르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특히 누군가를 섬기는 일을 한다고 할 때 벌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분주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제 시간에 할 수 있을지 안절부절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안 알아주고 힘만 들고, 힘들게 일해도 티도 안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힘들어, 아무도 안 알아줘. 시간 낭비하는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면, 우리에게 드는 감정은 분노가 될수도 있고 좌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우리 주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안 알아주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특혜만 누리는 것 같아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기억해야 되는 본문이 오늘 본문입니다.
2.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위에 있는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의 내용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신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했는데, 제사장도 안 도와주고, 레위인도 안 도와주었는데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누가 내 이웃인가요? 강도 만난 사람인가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왜 그들이 우리의 이웃인가요?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사람들이라 그런가요?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강도 만난 사람이라면 누가 이웃일까요?
내가 강도 당했을 때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감싸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힘들고 지쳐 있는 나를 자신의 짐승에 태워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나를 정성껏 보살펴 준 사람입니다. 또한 은화 두 개를 주인에게 주면서 내가 회복되도록 보살펴 주라고 말해준 사람’입니다. 나아가 내가 회복할 때까지 들어간 모든 비용도 나중에 다 갚아주겠다고 말해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지금 예수님과 제자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우리는 누구 일까요? 라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인가요? 아니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인가요?
우리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인이라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마르다가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반드시 해야 할 일들입니다. 당연히 자기의 것을 희생하고, 손해 보는 일입니다. 돈 생기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아무런 가치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고,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간 낭비이고,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이웃을 위해 이런 일들을 하실 각오가 되어 있으신지요? 그것이 크리스챤의 삶이라면 그렇게 하실 건가요?
그렇다면 여행으로 지쳐 있는 사랑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한 일은 어떻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도 도와주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대접하는 일은 힘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으실 겁니다. 내 몸이 아파도, 일어나서 해야 할 일들을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강도만난 사람이었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들을 위한 일이라면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강도 만난 사람일까요? 사마리아 인같은 분일가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인 같은 분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기쁨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을 한 이유일 것입니다. 마르다의 이웃이 예수님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시작은 마르다가 기쁨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마르다가 화 나 있는 모양새입니다. 열 받은 것이지요. 이렇게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과 편안하게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기쁨으로 시작한 일일텐데, 화가 나서 중간에 하던 일을 그만 두신 적은 없으신지요? 왜요. “누구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내가 잘 알고 있단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알아주시는 일, 예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일을 마르다가 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단지 마르다가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동생 마리아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나 처럼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자신의 주장대로 예수님도 움직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된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도 자신처럼 일해야 되고, 예수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해야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각 사람마다 할 일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할 일이 있고, 마르다가 할 일이 있다고 말입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봉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봉사는 잘하는데 말씀 읽기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반면 어떤 분은 말씀 읽기와 기도는 잘 하시지만 봉사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분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 라는 분은 ‘경건 훈련을 핑계로 상황에 따른 필요들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안되지만 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것은, 해야할 일은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 같이 누군가를 위해서 힘들게 일해야 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 때문에 그 일을 멈추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돕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린 제사장 때문에, 레위인 때문에 열 받아서,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되냐고 멈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르다가 마리아 때문에 열받아서 음식 준비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강도 만난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굶어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은 해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그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몰라줘도, 주님은 우리를 알아주십니다. 주님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십니다. 이거면 되지요? 다른 사람의 인정과 도움이 있으면 좋지만, 이런 것이 없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그 일이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이면 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열 받지 마세요. 누구 때문에 그 일을 멈추지 마세요. 누구 때문에 그 일은 포기하지 마세요. 주님이 우리게게도 좋은 쪽은 선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고,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해야 할일은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내 이웃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일은 우리를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 교회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의 이웃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의 이웃도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도 행복해 질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좋은 쪽을 선택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