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 동안 살펴봤던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큰 이유도 하나님 나라, 천국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매주 암송하고 불렀던 “주의 기도”에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주님의 나라에는 이런 곳입니다. 주님의 의와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구속과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치료하심과 주님의 지혜와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곳입니다. 아멘! 주님의 나라에는 이런 것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의 의와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구속하심과 주의 은혜와 주의 치료하심과 주의 보호하심에, 여러분과 제 삶 속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우리 삶 가운데 임하기를 , 내 삶 속에 임하기를 계속해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에 사는 백성들이 부르는 찬양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9-11)”
이 찬양이 우리의 찬양입니다. 이 찬양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이 찬양은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상관없이 부르는 찬양입니다. 기쁠 때도 찬양하고, 힘들 때도 찬양해야 하는 찬양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라고 찬양하세요. 찬양처럼 될 것입니다.
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번째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말씀하신 것으로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예루살렘이 높은 지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료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해발 790미터에 있습니다. 그 곳을 향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를 지게 될 장소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이 고난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고생하러, 능욕을 받으러 가는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 같으면 피하고 깊은 길입니다. 즐겁지 않고, 전혀 기쁘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길, 고생 길로 가고 계시는 주님이, 앞장 서서 가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시편 기자의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겁다”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서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계십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32절 후반절 “..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는 제자들의 발걸음이 꽤 무거웠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제자들 사이에 어떤 느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일행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의 인생 길도 묵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은 어떤 길일까요? 오르막 길인가? 내리막 길인가? 어려운 길인가?쉬운 길인가? 죽는 길인가? 사는 길인가? 영광의 길인가? 치욕스러운 길인가? 기쁨의 길인가? 슬픔의 길인가? 라고 말입니다. 수 없이 많은 인생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걷고 계시나요?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겁다”라는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걷는 길인가요? 아니면 “내 마음이 무겁고 내 고 내 영광도 슬프다”라고 노래하고 있으신가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앞장 서시는 주님에게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편 기자의 찬양이들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시선이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 그 이후의 일들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4절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발걸음에서 우리는 느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도 나를 가두지 못할 것이다!” ”나는 삼 일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이다! “ 고통을 받는 시간들은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기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매우 짧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받으실 고통의 시간보다 주님이 받으실 영광의 시간이 더 길기 때문입니다. 비교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길 위에서, 주님이 무엇을 생각하셨다구요. 주님은 십자가보다 부활에 더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앞장을 서신 이유입니다.
시편 16편은 주님의 노래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9-11)”
시편 118편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노래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 118:17).
이 노래는 또한 우리의 노래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앞장 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을 부르면서 말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선포할 것이다” 라고말입니다.
3. 어떤 소리에 민감하신가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기보다는 제자들을 더 많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3-34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어떤 말씀이 더 귀에 잘 들어오시나요? “죽이기로, 넘겨주고, 능욕, 침, 채찍질, 죽음. 그리고 부활.
아마도 부활이라는 단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우리는 죽음을 더 묵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를 두려움에 빠져 버립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더 크게 들리면, 우리는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너무 크게 보이고 더 많아 보입니다. 반면 나를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 사랑해주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작게 보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슬픈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즐겁지 않은 길이 되어 버립니다. 고통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아파 버립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부활이라는 단어보다 더 크게 들리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누가 제자들의 인생의 키를 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신가요? 아니면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인가요? 그들을 죽이려고 위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 길은 에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같습니다. 그 길은 고난으로 들어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치욕스러운 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무슨 길이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힘든 시간은 매우 짧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환영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앞장 서서 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길을 걷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어떤간요?
우울하신가요? 힘드세요? 그래서 죽을 것 같으세요? 망할 것 같으세요? 그런 생각을 우리를 지배할 때마다, 우리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NO! 아니야!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빨리 우리의 생각을 죽음이 아닌 부활로 바꿔야 합니다. 삼 일후에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를 미워하는 존재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우리 인새을 열쇠를 가지고 계시도록 하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이 모습에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시는 설렘을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가 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새로운 일을 준비하시는 주님. 부활을 준비하시는 주님. 새로운 예루살렘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시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환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반겨줍니다. 기쁨과 찬양이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 11:9-10).
제자들이 이것을 알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즐거웠을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사도 요한이 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의 삶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향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향해 올라가는 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묵상하십시오. 부활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의 찬양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