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때,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 있습니다. 또한 매우 자랑스러워 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근상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6년 개근상, 중학교 3년 개근상, 고등학교 3년 개근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장장 12년동안 한 번도 학교 결석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매우 성실하고, 착한 아이였다. 모범생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지요. 제 자랑 하는 것 같다고 기분 나빠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ㅎㅎ 물론 저만 개근상 받은 게 아니라, 제 친구들도 개근상 받았습니다. 제 친구들도 착했습니다. 사실 그 때 당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 가는게 당연했던 시대였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어떤 일이란” 것은, 아프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이 있는데요. 그 날은 눈이 정말 많이 왔습니다. 거기에 찬 바람도 쌩쌩 부는그런 날이었습니다. 길은 얼어서 차도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날 어머니는 어린 저를 업고 학교에 데려다 주셨습니다. 학생은 학교에 가야 된다면서요. 아마 어린 저에게 당연한 일은 꼭 해야 된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머니처럼 안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아이들은 아프면 학교에 안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 같으면 약 먹고 학교에 갈 것 같은데, 약 먹고 아프다고 학교에 안갑니다.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으면 학교에 안가려고 합니다. 아프면 쉬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당연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아프면 오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언제 부턴지 모르지만, 예전에 당연했던 일이 당연하지 않는 일로 바뀌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시나브로 당연한 일로 바뀌어 있는 현실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도 발견됩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다녔던 모교회는 아주 보수적이었습니다. 주일에는 읍내에 놀러가도 안되고, 주일에는 뭘 사도 안되었습니다. 하여튼 주일에는 하지 말라는 게 많았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자고 정했던 가이드라인 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겼던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파도 교회에 가고, 천재지변이 생겨도 어떻게 해서든지 주일에는 교회 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주일 성수가 당연해서, 한국 교회가 어쩌면 튼튼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청년 때 다녔던 교회는 주일 예배를 여러 번 드렸는데요. 그 당시 교회 분위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모든 예배에 참석할 것을 권장했고, 또한 모두가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긴 현상이 있었는데요. 아침 예배만 드리고 가는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이거나, 신앙 생활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는 겁니다. 몰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의미로, 여러 번 예배를 드렸을텐데요. 그런데 나중에 이런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예배 잘 드리고 집에 왔는데 죄책감이 드는 겁니다. 주일에 아침 예배만 드리고 예배당을 떠날 때면,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였습니다. 당연한 일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때 교회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이런 교회 분위기는 여전히 여러 한국 교회에는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의 당연함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최근에 일고 있는 코로나 19 때문입니다. 지금 전세계가 코로나 이야기 밖에 안하는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람들이 패닉에 빠져 있는 듯 합니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중 하나도 주일 성수입니다. 지금까지는 주일에 온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당연했는데요. 이제는 주일 예배도 모여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또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예배하려 왔다가 집단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설마 했는지 진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 알 수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불안감에 빠진 것 같습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부정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2.
당연한 것이 부정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요. 그 중 하나는 극심한 저항입니다. 당연한 것을 계속해서 지키려는 관성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연함을 부정하고, 새로운 규칙을 따라는 현상입니다. 이런 일은 개인 뿐 아니라 집단으로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들을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주님이 보여주신 같은 환상을 세 번이나 보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보았던 환상은 하늘이 열리면서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그릇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것들을 잡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베드로는 배가 고팠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 잡아 먹으라고 한 것을 세 번이나 어기면서 결국 잡아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평생 옳다고 여기고 지켜왔던 것, 즉 무슨 일이 있어도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는다는 것과 상충되는 말씀이여서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의 환상을 본 후에, 주님이 왜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는지 몰라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나? “ 이런 생각들이 베드로를 지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마침 세 명의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옵니다. 환상의 의미를 생각하는 베드로를 향해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냈다 (행 10:20)’라고 말입니다.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베드로의 마음 속에 의심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었던 주님과 전혀 다른 모습의 주님을 경험해서 그렇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 것이 당연했던 베드로의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베드로처럼 고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을 못하게 될 때,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당연한 것들이 부정되면, 우리는 열을 많이 받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시키신 일이라 고민하고 의심만 할 뿐이지, 다른 사람이 부정한 것을 먹으라고 했다면, 아마 그 성격에 버럭 화를 내거나 저주라도 했을지 모릅니다.
요즘 매일성경으로 마가복음을 묵상하고 있는데요. 마가복음을 읽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들의 대부분은, 그 당시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과 식사도 하시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즐기겼습니다. 이 뿐 만이 아니라, 주님은 나병에 걸린 사람을 만나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 같이 그 당시 사람들이 만나기 꺼려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멀리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한 사람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은 멀리하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당연함을 부정하시고, 소위 부정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루는 주님이 안식일에 한 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당연함을 부정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보였던 반응이 있습니다. 비난했고, 미워했습니다. 미움은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안식일에 모여서, 어떻게 예수를 죽일 수 있을지 의논하기까지 했습니다 (마가복음 3:6).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도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을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도 틀림없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반응할 겁니다. “의심하고, 눈살을 찌뿌리고, 비난하고, 욕 하고, 또는 분노로 가득찰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반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은, 우리의 당연함이 부정당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 때 내가 왜 그랬지?” 라는 후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시대에는 당연했던 것이, 다음 세대에서는 당연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파도 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서, 아프면 학교에 가지 안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을 공경하던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서, 부모님이 친구같이 된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변화가 있지요. 주일 성수가 중요하고 당연하지만,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는 각자의 처소에서, 가정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오고 있음을 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당연함이 부정될 때 당황할 수는 있지만,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당연함이 부정됨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당연함을 부정하심으로 일어난 일은, 이방인 선교가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당연함에 갇혀 있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당연함에 갇혀 버리면,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개혁은 항상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부정하면서 시작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리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것을 부정해 보십시오. 당연히 해 오던 것들을 의심해 보세요. 주님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을 못하게 하시다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또 다른 교훈은 주님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을 못하게 하실 때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당연함을 부정함으로, 그로 하여금 미래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삶의 지경을 넗히기 원하셨습니다.
3.
세대와 세대의 차이는 당연함의 차이입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 세대가 바뀌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을 부정해 보면, 우리의 관점이 바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도 달라집니다.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전같으면 베드로가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 23절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행 10:23).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베드로가 당연함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변화할 것을 요구하자, 그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베드로의 의심은 끝도 없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가 이방인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더불어 먹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버리자, 이방 선교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코노라 19로 온 세상이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세상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당연하다고 여기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악수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지금은 악수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과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합니다. 특히 기침을 하거나 열이 나는 사람들과는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밖에 나갔다 오면 손을 씻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위험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혹시 코로나에 전염이 되면, 2주간 자가 격리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비상 식량도 미리 준비해 둬야 합니다. 될 수 있는 한, 불필요한 여행은 자제해야 합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는 주일 성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로 같은 장소에 모인 것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로 보호하시는지 알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멤피스 지역에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우리가 할 일은 보건 당국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평상시에는 주일에 모여서 함께 예배 드리는 일은 중요하고 당연하지만, 비상시에는 당연한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는 것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4.
세상도 당연한 것에서 당연하지 않는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합니다. 전화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었습니다. 손편지가 이메일과 텍스트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하는 방식도 바뀌고 있습니다.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를 칭찬하심으로,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다고 믿습니다. 우리도 고넬료 처럼, 항상 기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고넬료 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고넬료처럼,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당연한 일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에게 주님이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의심하게 하셨지요. 베드로에게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무엇에 대한 의심이냐 하면, 당연함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를 통해 주님은 일하셨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당연함을 깨버리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인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당연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속되다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대신 그들도 주님의 구원이 임하기를 기도했으면 합니다.
마음에 안드는 정치인들이 있지요. 그들을 축복은 못하더라도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할 일은, 주여 이 땅을 고쳐 주십시오.
황폐해진 이 땅이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연함의 부정을 통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당연함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고, 의심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연함을 부정함으로, 부정한 사람도 인정하고, 참아주고, 믿어주고, 살리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 때 당시에 당연하지 않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 분이 시대를 앞서 가셨다는 것을. 예를 들면, 인권이 없었던 시대에 누구보다 인권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라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에게만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주님의 복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주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복음대로 사는 사람이 시대를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시대를 앞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난 후에 뒤를 돌아보면서 많이 변했구나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시대를 이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시대를 앞서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베드로를 이끄시는 성령님이 우리도 인도해 주시길, 우리 자녀들도 인도해 주시길 기도했으면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포하길 원합니다.
(찬양) 우리는 주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