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여름 충북 청주군에 사는 양반집 며느리 최 아무개 씨가 자살한 일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최 씨의 딸이 같은 동네에 사는 김 씨의 딸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데요. 나중에 최 씨의 딸이 자기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최 씨의 엄마가 “상년의 딸은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말이 돌고 돌아, 김 씨에게로 흘러갔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 씨는 화가 나서 최 씨를 찾아가서 따졌다고 합니다. “당신이 무슨 양반이라고 우리더라 상년이라고 해! 당신이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줬어! 하면서 삿대질을 하면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게 사건의 전부인데, 이 일 후에, 최 아무개 씨는 “상년”에게 이런 치욕을 당해 남부끄러워 살 수 없다면서 화가 나서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김 찬호 – 모멸감 중에서).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시나요? 현대를 사는 저희들에게는 많이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 때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27년은 조선시대가 끝나고 신분제도도 사라지고 있던 시점입니다. 그렇지만 양반집 며느리 였던 최 아무개 씨에게는 여전히 양반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가난해도 나는 양반집 며느리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보잘 것 없는 아랫 것으로부터 삿대질을 당하자, 양반의 권위가 떨어졌다면서 화가 나서 자살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최 아무개씨는 양반이 아랫 것으로부터 수치를 당했다고 여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인데요.
‘인간다움의 조건’이라는 책에 “수치심”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처신이나 상황에서 불명예스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불미스러운 것을 의식할 때, 혹은 자신의 품위나 체통을 훼손시키는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느끼는 수치감 또는 모멸감은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창피하다’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어릴 적에 창피해 했던 일이 있습니다. 구멍난 양말을 신고 학교 가는 일이었는데요. 그 때는 그게 죽기보다 싫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양말에 구멍이 날 수도 있지만, 혹시 다른 아이들이 보고 놀릴까봐 안절부절했던 것 같아요.
원래 “창피”라는 말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옷 매무새를 단정하지 못하게 흩뜨린 모습’이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옷 차림에 최소한의 격식을 갖춰야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 ‘괜찮은 옷’을 입어야 된다는 부끄럽지 않다는 감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옷이 권력이나 지위 또는 경제 수준을 함축하고 있는 셈인데요.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렇게 ‘창피하다, 또는 수치스럽다’라는 것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2.
다윗이 암몬 사람의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단을 꾸려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행동을 암만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이유가 고인에 대한 조의를 표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성을 두루 살피고 정탐하러 왔다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한 일은, 조문단으로 온 신하들의 한쪽 수염을 깍고, 입은 옷 가운데를 도려내어 양쪽 엉덩이가 드러나게 해서 다윗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이렇게 한 것은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일을 당한 신하들이 얼마나 수치스러워했을지, 이해가 되시지요? 신하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일은, 매로 심하게 때린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줍니다. 어디에요? 신하들의 자존심에, 그리고 마음에 큰 흠집을 내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다윗의 신하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었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제가 암몬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보면서 ‘껄껄 거리며 웃었을 것입니다’ 한 쪽 밖에 없는 수염과 엉덩이가 드러난 옷을 입은 신하들의 꼴이라니,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재미있는 구경거리니까요. 많은 암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을 거예요. 이렇게 우스운 광경은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영원히 자기들의 눈에 담아두려고 했을 것입니다.
암몬 사람들이 다윗의 신하들을 놀려대면서 미래를 걱정했을까요? 아니요!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그들에게 이 일은 그저 재미있는 일입니다.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듯이 다윗의 신하들에게 수치심을 주면서, 그들은 모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가 있어요. 이 일을 하는 자신이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 쯤이야 상대도 안된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말하면, 암몬 사람들이 제 정신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광경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발견됩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 15:16-20)”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떨어진 명령은 예수를 끌고가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일 중에는 상관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임의대로 알아서 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라고 한 부분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사용했던 회초리에는 납이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매로 놔두고,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칩니다. 예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려면 칼로 찌르면 되는데, 로마 군인들은 예수께 침을 뱉습니다. 갈대와 침은 에수에게, 아무런 물리적인 상처를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하지요? 바로 나약하고 지쳐 있는 예수님께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나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들추거나, 그들의 허물을 반복해서 끄집어내서 이야기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선사하고, 이로 인하여, “나의 우월함과 선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수치심을 주면서, 깔깔 거리며 웃는 암몬 사람들의 모습과 로마 군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맥스 목사님이 운전하면서 있었던 아주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분이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두 개의 차선이 하나로 좁아지려던 참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운전하는 차선은 없어지고, 옆 차선에는 한 여자가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맥스 목사님처럼 유명한 목사님의 스케쥴이 중요하잖아요. 사랑의 전달자요 평화의 대사가 목사이니까 하는 생각에 들면서 맥스 목사님은 자동차의 속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왠걸요. 옆 차선에 있던 여자도 속도를 올리더라랍니다. 문제는 두 차선이 하나로 줄어들 때, 그 여자분의 차가 맥스 목사님의 차보다 아주 조금 앞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맥스 목사님은 속도를 줄여야 했습니다. 그러자 옆 차선에 있던 여자가 어깨 너머로 잘 가라고 손짓하면서 약을 올리더랍니다. 그 순간 목사님이 열이 받으셨나 봅니다. 젠장! (참고로 저는 이렇게 말 안합니다.ㅎㅎ). 그리고 맥스 목사님 마음에 이런 말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잠깐만,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것이 내 사명이 아니던가?’ 그래서 여자의 백미러를 향해 하이빔을 살짝 쏘아 줬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속력을 엄청 줄여서 복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열 받은 맥스 목사님은 계속해서 하이빔을 쏘고, 열 받은 여자는 거북이처럼 더 느리게 운전하다가, 길이 다시 넓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스 목사님은 차를 추월해서 갔는데, 이번에는 빨간 불에 걸려 두 차가 교차로에서 나란히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자 분께서 창문을 내리시더니, 손을 들어 절대로 흉내서는 안되는 신호로 맥스 목사님께 한 방을 먹이시더랍니다. 맥스 목사님께 수치심을 안겨드린 것이지요.
이 일 후에 맥스 목사님은 죄책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왜 그랬지?”라고 말입니다.
3.
맥스 목사님은 사람들 내면에 야수가 살고 있다고 은유적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 마음에 악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수치심을 주는 행동 속에는 “나는 강하다”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한국에서 큰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갑질’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재력이 좀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 여기는 태도 속에는 ‘너 처럼 약한 것이 별 수 있겠어’하는 마음이 그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종주의도 사실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 선배 목사님들이 해 주셨던 권면이 있는데요.그래서 제가 그 동안 하지 않았던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째는 교인들이 얼마나 헌금하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 나중에 정확하게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교인들이 헌금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 아닌가요.
두번째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치 이야기는 사실 재미 있어요. 잘하는 정치인들을 칭찬하는 것은 조금 재미있지만, 잘 못하는 정치인 욕하는 것은 정말 재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욕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이게 일거양득인 셈이지요. 그런데도 선배 목사님들이 제게 “정치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목회자가 정치색깔을 나타내면, 그 순간 교회가 둘로, 또는 그 이상으로 갈라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빨간색일까요? 파란색일까요? 아마도 여러분이 짐작은 하실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알 길이 없는 이유는 제가 공개적으로, 사석에서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에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많은 경우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들을 이야기할 때 모욕적인 말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나오는 기사의 댓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나와 똑같이 그 정치인을 싫어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만, 반대로 그 정치인을 좋아하고 있다면, 모욕을 당했거나 수치심을 받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시더라도 너무 모욕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배려해 주세요. 교회에 상한 마음을 고치려 왔다가 더 마음이 상해 버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수치심을 주고 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한 예로,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다윗과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골리앗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오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 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모욕을 주는 이유는 상대방의 영혼에 치명상을 주기 위해서 라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모욕감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전략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수치심을 당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첫번째 반응은 사울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골리앗의 말을 듣고 그들의 영혼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게 골리앗이 원하는 것입니다. 칼로 싸우지 않아도, 모욕감을 주는 것만으로도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두번째 반응은 다윗처럼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이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달려 갑니다. 수치심응 당한 사람들 안에 생기는 분노가 얼마나 강렬한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당하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울 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생긴 분노가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정치인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생긴 분노가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에 대한 모욕으로 생긴 분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의 이름이 모욕 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분노가 있으신가요?
다윗은 암몬 사람들의 모욕에 분노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것에 대한 답으로 모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거절당한 것입니다.
4.
그런데 6절을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을 사게 된 줄을 알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다윗의 신하들에게 수치심을 주면서, 전쟁이 날지 몰랐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예수의 머리를 갈대로 때리면서, 또한 침을 뱉으면서 왜 자기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약간의 쾌감을 느껴보려고 그런 것인데, 그것이 은혜를 악으로 갚고 있는지 미쳐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암몬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로마 군인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부를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도 그들과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여러분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적이 있으셨나요?
정신 차리고 나니까, 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암몬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두려워 했지만, 다윗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전쟁을 이길 수 있도록 철저히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들이 살 길은 회개하는 것인데, 암몬 사람들은 그 길을 버리고, 어리석은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의 말씀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합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므비보셋 같은 사람에게도 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암몬 사람들 같은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므비보셋과 같은 사람은 주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황무지 같았던 그의 인생은 풍성한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반면 암몬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했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로 스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암몬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요지이기도 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 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지혜롭고,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정죄는 이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암몬 사람들의 악함은 다윗의 신하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예수에게 침 뱉음으로 예수의 영혼을 짓밟았습니다. 그들이 빛 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암몬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지 않나요? 우리도 로마 군인처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희롱한 적은 있나요? 만일 그런 적이 있다면, 주님께 우리가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을 항상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들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40-42).
또한 여러분 중에 예수님처럼, 다윗의 신하처럼 무시를 당하거나 수치를 당해서 마음이 상한 적은 없으셨나요? 그런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의 치유하심과 위로하심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이 지난 수요일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절이 한 달 앞으로 다가 왔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암몬 사람들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으신 주님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은 로마 군인들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한 없는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 그 은혜를 깨닫고, 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