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주 보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노래를 열심히 하는 모습도 보기 좋구요. 사람들이 자기 스타일로 노래를 해석하고,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도 좋습니다. 그리고 저도 저렇게 노래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대리 만족을 할 수 있는 것 같아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노래가 끝난 다음에, 참가자들에게 심사위원들이 해 주는 조언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제 삶에도 저런 조언자가 필요하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제게 하는 말로 열심히 새겨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의 조언 중에는 별 것 아닌 내용도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손을 들어보세요. 발도 좀 움직일 수 있나요?’ 가만히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참가자에게 해 주었던 한 심사 위원의 조언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여라’ 이런 조언은 참 별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참가자가 그 조언을 따라서 할려고 하면서 참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을 하루 아침에 고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심사위원의 조언은 참가자가 가지고 있는 자기 만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주문인 것입니다. 저도 심사위원의 말을 들으면서 많이 공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처럼, 자신이 편하게 생각하는 행동과 말을 바꾸려는 노력이 얼마나 힘들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손을 들고, 표정을 노래에 맞추고, 리듬에 맞게 몸을 움직이려는 참가자의 모습에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과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러 사람들을 보면 안스럽다는 마음이 듭니다. 왜냐구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어서 그럴 겁니다.
예배 시간에 축도하기. 찬양하면서 손을 들기.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몇 년씩 걸립니다. 지금도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손 드는 거 별것 아니지만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같은 주문을 하면, 저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실 분이 있으실 겁니다.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기. 이렇게 기도하려고 하면 마음 속에는 온갖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시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손을 들라고? 그게 어려워? 아니야 무슨 손을 든다고 효과가 있겠어?’ 이렇게 말입니다. 큰 희생을 요구한느 것도 아니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닌데, 이런 일이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손을 드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기 힘들고, 자신만의 틀을 깨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틀을 깨 버리고 새롭게 틀을 짜는 일은 어렵고도 힘겨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것을 습관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또는 스타일이라고 부를 때도 있습니다. 좋은 습관은 성공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그렇지요? 반면 나쁜 습관은 인생을 망치겠지요?
2.
백부장인 고넬료에게는 좋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구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습관입니다. 기도는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이고,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도 기도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1분은 정말 긴 시간입니다. 마찬가지로 1분 기도하던 사람에게 10분 정도의 기도는 너무나도 긴 시간입니다. 기도는 훈련이고, 그래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좋은 습관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루를 마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좋은 습관인 것입니다. 이런 습관이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고넬료는 기도하는 것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좋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에게도 고넬료와 같은 좋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도 하루 세번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 지도자 였기 때문에, 기도를 갑자기 하기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도를 훈련했고,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보여주신 삶의 본을 따라 기도가 그의 삶이 된 것입니다. 그에게 있었던 좋은 습관이었습니다.
좋은 습관은 살리고, 나쁜 습관은 버리면 됩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데 보통 66일 걸린다고 합니다. 사실 66일이 걸려도 나쁜 습관을 고치지거나, 좋은 습관이 생길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중간에 포기해서 나쁜 습관은 고치기 어렵고, 좋은 습관은 얻기 힘듭니다. 모두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3.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습관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만, 더욱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옳다고 믿어 오던 것들을 바꾸는 일입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양반의 피’는 ‘노비의 피’와 다르다고 믿었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피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믿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혈통이 좋은 사람끼리 결혼하면 좋은 혈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백두 혈통’이런 말을 사용하던데요. 양반의 피와 노비의 피가 다르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노비들 뿐 아니라 양반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피는 신분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피는 더 귀하고, 누구의 피는 천하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습니다. 잘못된 믿음이나 신념이 고쳐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 중 하나는 성 역할에 대한 개념입니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남자는 이래야 된다’ 여자는 이래야 된다’ 이런 식의 말들이 많았스비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말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하던 일을 여자가, 여자가 하던 일을 남자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십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드리고 싶냐면, 우리가 오랫동안 옳다고 여기던 것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생각들로 채워지면서 자리 잡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믿어 왔고 지금도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그 곳은 거룩한 곳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맞는 말 같은데, 그러면서 성전이라는 건물이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 건물이 거룩한 곳이 아니라, 주를 믿는 너희들이 거룩한 곳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런 개념을 받아들이기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4.
사도행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오랫동안 믿어오던 것들이 수정되는 일들 말입니다. 옳다고 믿어 오던 일들이 성령님의 간섭하심을 통해 수정되는 일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씀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120명의 사람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일들. 무식한 베드로가 설교하자 수 천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일들.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어 왔던 것들이 무너지면서 생긴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도 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위험한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존재들은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바울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일 후에, 바울은 누구보다 열심으로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이 순식간에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단번에 주시기도 합니다.
유다서 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믿음은 단번에 생깁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기도 중에 보았던 환상의 내용은 베드로에게 가지고 있었던 믿음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보았던 환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베드로의 환상에 나오는 동물과 새들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부정한 것들입니다. 주보에 나온 그림을 보시면 어떤 동물들인지 아실 수 있으실텐데요. 사반, 토끼, 돼지, 독수리, 솔개, 물수리, 까마귀, 타조, 올빼미와 같은 동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하신 명령은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 금하
고 있는 동물들을 잡아 먹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바로 대답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라고 정답을 이야기 합니다.베드로의 말은, ‘저는 그런 일을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평생 동안 지켜오던 믿음과는 정반대의 일을 시키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못할 것 같아요. 하나님이 저를 시험하시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환상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 때마다 베드로가 똑같이 대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믿고 있었던 것을 내려 놓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베드로가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는 밥도 같이 먹지 않았고, 부정하게 여겼는데, 베드록 가지고 있었던 이런 믿음과 태도를 하나님은 바꾸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정답인 것 같지만 정답이 아닙니다.하나님이 깨끗하다고 이미 선언하셨는데, 베드로는 자기의 주장을 3번이나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틀렸고, 제가 맞았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일이 힘든 일기도 합니다. 자기의 뜻을 굽히고, 자기의 의지를 꺽어버리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인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 의지를 꺽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은 자존심 싸움에서 이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큰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집니다.
베드로가 보던 세상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베들에게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참으로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고 왔던 것을 무너뜨리는 일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은 결국 베드로의 삶의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우물안 개구리 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고자 한 그림은 사도행전 1장 8절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주 에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보는 것 말입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오래된 믿음이 깨어진 것은 주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가 보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잘못된 믿음을 깨뜨려주시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5.
베드로의 환상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하나님은 참으로인자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 리고 하신 것을 부정하다며 먹지 않는 베드로를 여러번 설득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이나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베드로를 참아주십니다. 그 만큼 베드로가 스스로 깨닫기 어려웠던 주제였기도 했습니다.
베드로가 잘 했던 일이 19절입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해 생각한 것’입니다. 이해가 안가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묵상하고 주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말씀해 주십니다.
베드로에게 해 주신 말씀은, ‘이방인들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깨끗하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민족과 나라를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 서는 누구든지 깨끗해 졌다는 선포하신 것입니다.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요. 너희는 부정하지 않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스타일이 중요하지, 내 스타일이 중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대답할지 모릅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내가 누군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수 제자 아닙니까. 제가 어떻게 그런 부정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질책하고, 하나님이 틀렸다 라고 말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6.
가만히 서서 노래만 부르던 사람에게 손을 들라고 하면 힘이 듭니다. 예배 중에 침묵을 하던 사람에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손을 들거나 찬양하면서 손을 드는 일도 힘이 듭니다. 자신의 틀을 깨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찬양을 하시다가 손을 들어보세요. 기도하다가 손을 들어보세요. 아멘이라고 소리내 보십시오. 할렐루야! 라고 외쳐도 됩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깨지는 것 같지만, 자유로움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유함과 평안함입니다.
우리의 상식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오던 방식이 바뀌었다고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새로운 길이 보이길 바랍니다. 주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여러분과 제가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기를 원합니다.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