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첫번째 시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가 오늘 본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라는 별명이 붙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여러분과 묵상하길 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비유에는 세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아버지와 두 아들인데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둘째 아들에게 맞추어져 있어서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데요. 오늘은 둘째 아들과 아버지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첫째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비유의 실제 주인공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버지입니다. 두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탕자의 모습 보다는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아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때 당시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라면 가부장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절대적이었던 시대였습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 행동 하나가 매우 조심스러웠던 시대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저도 그런 동네에서 살아봐서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행동이 가족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에 금방 소문이 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작은 아들의 행동은 매우 충격적인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내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이 때 당시 풍습에 따르면, 모세 율법에 따라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눠졌습니다. 재산을 나눌 때는 큰 아들에게 2/3를, 둘째에게는 1/3을 물려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의 아버지가 매우 부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둘째 아들에게 준 유산의 규모도 대단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둘째 아들의 행동이 매우 충격적이라고 말씀 드린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당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시기 때문입니다. 언제 재산을 나눠주냐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이었습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 언제 돌아가시거예요?’ 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나 다름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지금 살아계신 분을 죽은 사람처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충격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모습은 이상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 패역한 아들을 참고 재산을 나눠졌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패역한 아들은 마을 사람들 앞에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명기 21:18-21)’
이 말씀대로 하면 작은 아들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둘째 아들이 원하는대로 재산의 일부를 나눠줬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이런 아들이 있다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아요. 부모의 말을 듣지도 않고, 부모를 죽은 사람 취급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더 큰 골치 아픈 일이 13절에서 벌어집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가 준 재산을 정리하고 먼나라로 가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토지를 주었을텐데, 그 토지를 팔아버리고 떠나 버린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둘째 아들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는 재산을 정리해서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먼 나라 라는 의미는 이런 것이지요. 아버지의 영향이 미치는 않는 곳에 갔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자유가 넘치는 곳으로 갔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그런 나라로 떠 나고 싶지 않으세요.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무에게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나라에 말입니다.
저는 둘째 아들의 마음을 알아요. 그리고 먼나라에 간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시골에 살다가 서울로 공부하러 갔을 때 그 의미를 알아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많지만, 내가 무엇을 해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시골과는 달리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으니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자유가 있어요. 둘째 아들이 먼나라로 간 이유이지요. 아버지 간섭도 없고, 형이랑 경쟁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에 말이지요.
둘째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난 이유는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에게 먼나라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는 곳이지요. 젊은이 답게 둘째 아들은 요즘으로 따지면 고급차를 타고, 고급 옷을 입고, 남들이 먹고 싶어하는 맛있고 품위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그는 자신을 나타내고 싶었을테니까요.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면서 옛날과는 전혀 다른 나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아버지의 그늘이 없는 곳에서 정말 멋진 삶을 살아보겠다고 둘째 아들이 결심을 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추구했던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아마 크게 만족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했을 겁니다. 멋있다고 이야기 해 줬을거예요. 남자 답다고 말해줬을지도 모릅니다. 패션 감각이 있다고 말해 줬을지도 모릅니다. 먼나라에서 둘째 아들이 찾은 자신의 멋진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려는 하는 것이 바로 둘째 아들과 같아요. 사람들은 멋진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페이스북이 좋은 예인 것 같아요. 페이스북 이라는 소셜 미디아를 보면 사람들의 그런 마음이 잘 읽혀집니다. 페이스북을 올라온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다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가족들과 항상 웃고 잇습니다. 멋진 풍경도 있구요.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 사진도 항상 올라옵니다. 사람들이 멋지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의 진짜 얼굴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화장기 있는 얼굴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먼나라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둘째 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과시하면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너무 치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가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써야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가진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돈만 낭비한 것이 아니지요. 그는 자신의 인생도 낭비해 버렸습니다.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면 이렇게 됩니다. 또한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없고,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곳에서 사람이 얼마나 허랑방탕해 질 수 있는지도 알게 됩니다. 로또에 당첨된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패턴이기도 합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은 갑자기 생긴 부로 허랑방탕하게 시간과 인생을 낭비하다가 그들의 삶에 흉년이 들어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도 그 날이 왔습니다. 멋지고 화려한 생활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험오하고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멋진 생활을 꿈꾸며 살아온 나라에게 그는 꿈 같은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멋진 자신의 모습이 사라질 때의 절망감은 매우 컸을 겁니다. 그리고 점점 비참해져 가는 자신을 모습을 발견합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재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이 얼마나 비참한 자리에 내버려졌는지 잘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멋진 모습을 찾기 위해 찾아온 그곳에서, 둘째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인생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다음 둘째에게 큰 깨달음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둘째 아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본 것입니다. 멋진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렇게도 혐오하던 돼지와 살아야 할 뿐 아니라, 배가 고파서 돼지의 먹이조차 먹고 싶어하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녀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때 생각이 났던 사람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어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가면 종들도 이런 대접은 받지 않는다도 된다는 것을 둘째 아들이 깨달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자신이 얼마나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살았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저는 그가 매우 풍족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종들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멋진 옷과 가마를 타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은 또 다른 세상을 마음에 두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샆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삶의 결론은 흉년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시겠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사람에게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찾아왔던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1절).
그런데 우리가 의심하지요. 둘째 아들의 회개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풍요로울 때, 아무 것도 걱정이 없을 때 한 고백이 아닙니다. 그가 한 고백은 그가 배고플 때 한 고백입니다 그가 궁지에 몰렸을 때 한 고백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가 어떤 사람인가 말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배 고플 때 한 고백입니다. 배가 채워지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을 믿으실 수 있으세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한 이야기를 믿으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버지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20절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 당시의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글을 읽으셨으면 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둘째가 돌아올 그 날을 항상 기다리고 있었던 같아요. 둘째가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먼나라로 갔지만, 언젠지 모를 그 날이 오면 다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 같아요. 어쩌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힘들고 지쳐 있는 작은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에 변화가 생깁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작은 아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하고 떠난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비유에 나오는 이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왜냐구요?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모욕적인 일이지만, 작은 아들을 마을 사람이 먼저 발견하면 그가 돌아 맞아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패역한 아들이라고 이미 소문이 다 나 있는 동네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들을 보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그에게 달려갑니다. 누구보다 먼저 아들을 챙겨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런 모습은 아버지에게는 좀 낯선 장면입니다. 어머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행동은 여기서 머물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종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오라고 합니다. 아들이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작은 아들에게 권위를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에 발에 신을 신기웁니다. 아들에게 자유로운 자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에게 배푸는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하심과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보여준 자비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죽었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욕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세상의 욕망으로 치장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하나님을 다시 기억해 내 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행해 하나님 아버지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달려가서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옷을 입히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능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자유를 부여해 주신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 보여주신 마음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향해 보여주신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죽었다 살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그런 분이 하나님 아버지 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찾겠다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나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흉년이 왔을 때 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돼지 우리에서 돼지와 먹을 것을 다투며 살아가는 처량한 인생을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데, 주님을 떠나서 멋지게 살아보려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죄악된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아들이 발견한 자신의 모습도 바로 죄악된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의 결정이 잘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따뜻했고, 평안했습니다.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용서하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아주시고, 입을 맞춰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옷을 입히시고, 반지를 끼워주시고, 자유인의 신발을 신겨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는 람베르트의 작품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잘 보시면 한 노인이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를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그 사람에게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람베르트의 젊은 날은 둘째 아들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는 화가로서의 명성을 누리면 방탕스러운 삶을 살면서 멋진 척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의 삶에 흉년이 왔습니다. 파산을 했고, 아내가 죽었고, 그의 자녀들도 죽었습니다. 그렇게 험한 시간을 보내다가 자신의 노년에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안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도, 어쩌면 돼지 냄새가 역겨울 수 있는 자신을 안아주시는 분의 품에 안겨 있는 램베르트를 발견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과 고통이 그대로 녹아 버리는 순간인 것입니다. 고통이 평안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안아주실 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안아주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형편없지만, 그래서 죄인이라는 고백밖에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안아주시고, 우리에게 입 맞춰 주십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자녀라는 옷을 입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의 신을 신겨 주십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힘들고 지쳐 있는 우리를 안아주시는 그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렘브라트처럼 주님의 품에 안겨 보시길 바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