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열매를 좋아합니다. 아니, 저는 개인적으로 열매를 무척 좋아합니다 라고 말씀드리는 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저는 나무도 열매 맺는 나무가 더 좋구요. 식물도 열매 맺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런 저런 열매를 따바도면, 괜히 풍성하다는 느낌으 들어서 좋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추수 감사절은 우리에게 풍성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아요. 우리 안에 풍성한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망을 품어보는 날인 것 같아요. 우리 삶에도 이런 풍성함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라는 소망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그 풍성함 뒤에는 누군가의 많은 수고와 인내가 있었음을 깨달고 감사하는 날이 추수감사절이 아닌가 합니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열매는 그냥 맺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열심히 가꾸고 수고해야 얻어지는 것이 열매입니다. 땅을 파서 거름을 줘야 합니다. 때를 따라 물도 줘야 합니다. 잡초도 제거해야 합니다. 열매를 갉아먹는 벌레도 잡아줘야 합니다. 여기에 킴 윅스 선교사님은 열매를 얻기 위해 밤낮으로 노래도 불러주십니다. 이런 수고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정체가 바로 열매입니다. 추수감사절은 그런 수고와 인내가 우리 눈 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난 시간입니다.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로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이 있어서 든든했다면 그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꼭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옆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분에게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누군가의 사랑이 없으면, 누군가의 관심이 없다면 도저히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다면 감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누군가의 관심을 받으셨다면 감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쁜 일상을 멈추고, 우리로 지금까지 살게 한 분들을 떠 올려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잊지 말라고’고 말입니다. ‘제게 고맙게 해 준 분들을 잊지 말라’고 말이지요. 또한 무엇보다도 항상 제 곁에 있었던 가족들에게도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오늘도 함께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무화과 나무 이야기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랜 평화와 번영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열상 4:25)’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 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은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미가 4:4)’
‘오랜 평화와 번영’을 의미하는 무화과를 기르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교회에도 작은 무화과 한 그루가 올해 심겨졌는데요. 무화과를 기르면서 얼마나 지극 정성을 다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언 27장 18절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무화과를 지키며 돌보는 자만이 그 과실을 먹는다는 잠언의 말씀인데요. 또한 과수원지기의 극진한 돌봄이 필요한 무화과 나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책에서 보니까, 사람이 돌보지 않는 무화과는 작은 덤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잘 돌본 무화과만이 열매를 맺고 잎이 무성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3.
그런데 오늘 비유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는 매우 특별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라는 표현입니다. 무화과 나무 자체도 극진하 보살핌이 필요한데, 그것보다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들였다는 것이 바로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라는 것입니다. 과수원지기가 그 만큼 정성을 다해 키웠을 것이다 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키우듯이, 과수원지기는 무화과를 위해 거름도 주고, 물도 주고, 어쩌면 축복의 노래를 불러줬을 것입니다. 이렇게 키운 무화과는 분명 좋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로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비유에 나오는 무화과의 두번째 특징은, 과수원지기의 애정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수 년째 아무런 열매도 열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투자를 7년 정도했으면 결과나 나올 법도 한데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주인들은 나무를 자를 것을 결심합니다. 저희 집에도 앵두 나무가 있었는데, 몇 년 키우다가 잘라 버렸습니다. 수 년을 기다렸는데도 제대로 열매가 열리지 않아서 입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블루베리를 심었습니다. 과수원지기는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것은 열매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무 열매가 없으면 잘라 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는 땅만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유에 나오는 무화과는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쓸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짤림을 당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과수원지기의 특별한 배려 때문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8,9절).’
그래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는 1년이라는 시간을 벌게 되었습니다.
비유에서 포도원지기는 하나님을, 과수원지기는 예수님을, 무화과 나무는 사람들, 즉 우리들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는 나나님이 포도원에 특별히 심으신 것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찍힘을 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우리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이유를 비유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과수원지기의 인내와 수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8,9절).
과수원지의 정성과 인내를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인내와 정성, 그리고 사랑을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열매가 없어도, 바로 찍어버리싲지 않으시고, 여전히 땅을 파고 거름을 주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이런 수고에는 또한 주님의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를 인내해 주시고, 우리가 자라고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야할 열매는 성령의 열매일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고 우리로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또한 우리의 정욕과 탐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입니다.
4.
최근에 수 많은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허리케인과 지진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자연재해를 보면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저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일을 당할까 라고 말입니다. 신문을 통해, 또는 역사를 통해 독재자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건들을 보면서 드는 생가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일이 벌어졌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죄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하던 일에 잘 못되었도 하늘에 주는 벌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의 시대에도 이런 현상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습니다. 실로암이라는 곳에서는 망대가 무너져 내려서 열여덟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말입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이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이런 사건들을 볼 때, 그 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로는 권면입니다. 그 권면 이후에 나온 비유가 오늘 본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같이 아파하고 걱정해 줄 수 있는 세상이 살만한 곳입니다. 같이 아파하고 걱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나의 의로움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런 고생을 하냐면서 은근히 나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는 습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거든, 나를 살펴보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너도 저렇게 하면 망한다. 조심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신문에 나오는 온갖 부정들은 어쩌면 나를 향한 경고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망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넷째. 자신을 돌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의 정욕대로 살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한다고 결심해 보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잘 안된다는 것을 우리가 또한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를 돌보았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보살펴 달라는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입니다. 과수원지기의 돌보심이 있으면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생명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셔서, 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올 한해도 무사히 마쳐가고 있는 것은 과수원지기 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추수감사절인 것 같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를 향한 심판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음을 우리가 또한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때는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를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회개해야 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은 축복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축복입니다. 회개함으로 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