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를 뽑으라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가, 찬양 곡 중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하는 곡이 많습니다. 그 중 한 곡인데 찬송가 447장의 ‘오 신실하신 주’라는 곡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한 모든 것 내려 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아멘!
묵상하면서 이 찬양을 부르면, 우리에게 힘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와 주님이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주님이 신실하시다는 부분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예전에 하신 말씀이 지금도 동일하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주님이 어떻게 행하실지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하셨던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며, 이것이 우리가 가진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만일 주님이 신실하지 않으시다면, 만일 주님이 불량하시다면,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 인해 근심과 걱정을 하느라, 지금보다 더욱 괴로운 날들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계절마다, 또는 아침 저녁으로 감정 기복이 변하신다고 하신다면, 우리 삶에 평안이, 평화가 있을 리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아침에는 엄청 포근하셨다가, 밤에는 남극의 추위같으시다면 말입니다. 요즘 제가 가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 집에 있는 그 분께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천만 다행인 것은, 우리 주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봄철과 또 여름 가을과 겨울과 해와 달 별들도 다 주의 것,
만물이 하나로 드러낸 증거 신실한 주 사랑 나타내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런 기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해 주셨던 말씀이 우리에게도 임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이 주일 아침에 여러분과 제게 강력하게 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대가 무엇인가요?
주님이 힘들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제자들과 늘 함께 해주셨던 것처럼, 우리와도 늘 함께 해주신다는 기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또한 이렇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이 찬양 처럼 우리가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2.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할 말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또한 제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도 많으셨을 겁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이 제자들에게 해 주신 말씀을 보면, 예상과는 달리 매우 간단하고 너무 단순합니다. 너무 말씀이 없으셔서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예수께서 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을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은 ‘평안하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살롬! 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에도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살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이 살롬이라고 하십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책을 보면, ‘살롬’이라는 짧은 글이 있는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히브리인의 언어, 성경의 언어 가운데 독특한 언어가 있다. 살롬이라는 인사말이다. 평안이나 안녕을 뜻하는 말이지만, 임마누엘이요, 평강의 주, 메시야 예수에의 약속이요, 기도요, 축언이다.
그들이 조석으로 나누는 인사, 병석의 애인에게도,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임종의 아버지에게도, 멀리 떠나는 친구에게도, 태어나는 아이에게도, 몇 분 후에 의학 생체 실험 도구로 쓰기 위해 독일의 나치 당원들에 의한 유대인 수용소 어머니의 품에서 끌려가는 어린 딸에게도 샬롬을 빌어 준다.
예수가 바로 이 살롬이다.
스승을 잃은 제자들에게는 평강이, 살롬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불안했고, 걱정했고, 갈 바를 몰랐습니다. 무엇을 해야 될지 소망도 없어졌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주시고자 했던 선물이 바로 살롬, 평강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같은 마음이신 분이 있다면, 이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 특별히 임하시게 되기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물질적인 넉넉함이나 정신적으로 든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매우 서운해 하셔야 합니다. 예수께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며,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는 자신을 욕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여러 번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믿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운하고 원망스러울 수 있었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는 이런 의미를 담겨져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모두 잊어버렸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다”라는 겁니다.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이 없어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옳은 말’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 마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약’인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평강’이라는 약이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도 ‘평강’입니다. 우리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죄송스럽고, 죄책감을 느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을 이렇게 들으셔야 합니다. ‘내가 다 잊었단다. 내가 다 용서했단다. 그러니 평안하려무나’ 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또한 주님의 ‘평강’의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성탄절에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4)”
예수님의 생은 이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는 삶 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도 같습니다.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냐 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즉 평강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끝났고, 승리했으며, 그래서 평강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온전한 평화는,
첫째는 우리 영혼이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되는 평안이요.
둘째는 흑암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평안입니다.
따라서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는 선포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선포는 드디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평강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이 축복을 누리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가 흥미롭게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지금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는 믿음도 없어 보이고, 의심도 많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주님의 부활 소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간증하고 있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네, 보았네 하는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는 주님이 그들 가운데 서 계실 것이라는 기대도 없고, 또한 주님을 영접할 마음의 상태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모임은 흡사 우리들의 모임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는 게 아주 별 볼일 없고, 의심도 많고 근심도 많아요. 기도의 용사들이 모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계시다는 확신도 믿음도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곳에 주님이 오신다는 겁니다.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냐면, 우리의 모임이 아무리 형편 없고, 엉성하더라도,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삶을 나누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있지요. 주일 아침에 말씀 읽기, 금요일에 기도하기, 별 것 아니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하는 별 볼 일 없는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 모임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왜 그럴까요? 겨자씨 같은 믿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주님이 보셨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보일락 말락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 맞어?’ 할 정도로 사람들이 보기에도 작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도 주님이 오신다는 겁니다. 기대가 없어도,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주님이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겨자씨 같은 믿음에 담긴 생명력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너무 작지만, 땅에 심기우면 싹이 나는데요. 만지면 부러지게 생긴 것이, 어디에서 생긴 힘인지 모르지만 바위도 뚫고 나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크게 자라서 새가 놀려올 정도로 되는 것이 겨자씨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제는 보이지도 않았지만,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땅에 심으시면 자라게 되고, 그래서 나중에는 거대한 나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난다고요? 주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모여 있는 제자들 마음에 있는 잡초를 뽑아주십니다. 제자들 마음 속에 자라고 있는 잡초는 두려움과 의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두려움과 의심이라는 잡초를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우리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습니다. 자녀 걱정, 돈 걱정, 건강 걱정, 거기에 교회 걱정 하느라 우리 어깨가 무겁디 무겁습니다. 우리에게 산다는 것은 두려움이자 의심이 연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두려운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잘 못 알아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는데,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평안을 주시고자 하는데, 주님이 우리를 혼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오해합니다. 그래서 의심과 두려움이 우리에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있어요. 주님을 바로 알게 해 주세요 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의심에 물을 주고 영양분을 공급하면 우리의 믿음은 자라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과 의심이 들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모여있는 제자들에 오신 또 다른 이유는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주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필요한지도 몰랐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이 필요한지도 모를 때도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는 주님이,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필요합니다.
이 찬양이 생각나더라구요.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 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 소리 주님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우리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주가 필요합니다.
깨지고 상한 마음 주님 열어 주세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사를 생각하시면서 함께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