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1.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열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갑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이니, 보람도 있었으면 하고, 의미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봉사도 하고, 구제도 합니다. 악한 일보다는 선한 일을 하려는 이유입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인정 받고 싶고, 칭찬 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축복된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꿈꿔 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미워도 합니다.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서로를 용서하면서 우리는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수고가 많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인생은 피곤하고 쉼이 없습니다. 참 열심히 살았는데, 원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분은 명예도 얻고, 이들은 부와 권세를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혼돈에 빠지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모두 무덤을 향해 달려 가는 중이라는 걸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아껴 보려고 해도, 예외없이 생명은 소진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도달한 곳이 무덤이라는 생각을 하면, 인생이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 죽음을 보면서도, 여전히 무덤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죽음은 다른 사람 이야기 입니다. 여전히 무덤은 다른 사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죽음을 접하면 새로운 충격과 슬픔에 잠기는 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읽을 수 있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다간 사람들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다하는 태도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죽음은 정말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죽음은 별 거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가득했습니다. 사람마다, 믿음에 따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2.
마태복음 27장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는 장면들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입니다.
예수님의 11제자들은 예수님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또한 예수님 처럼 죽게 될까봐 두려운 나머지 숨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죽음을 각오하고 용기를 낸 제자도 있었습니다.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하는 거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예수님의 시체를 수습하고 자기가 쓰려고 구입해 두었던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또한 큰 슬픔에 빠진 여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 옆을 지켰습니다. 죽음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더 컸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이에게는 충격과 두려움으로, 어떤 이에게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용기로, 어떤 이에게는 사랑으로, 어떤 이에게는 절망으로 다가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조롱 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면서 미쳤다고 하고, 모욕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신은 정의를 행하고, 자신은 옳으며, 자신은 죽음도 피해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했으면 합니다.
무덤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덤을 아무리 많이 접해도, 우리는 여전히 슬프고 아파하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두렵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덤을 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 주심입니다. 그러므로 무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또한 무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인간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어떤 죽음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무덤은, 생명이 우리 삶의 일부인 것처럼, 죽음도 우리 삶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렇지만 이런 깨달음이 있어도,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두렵고, 무섭다는 것입니다.
‘내일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구원의 확신을 묻는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기도 합니다. 그 때는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우리 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안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 마음에 평안을 주시 옵소서. 제 안에 용기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평안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3.
그리고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기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그는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있은 후에야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죽게 되었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이것이 우리의 평안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보다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보다 깊이 있게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아니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번 예언하신 것이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예수님은 절대 죽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능력이 많고, 인기가 대단하신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라고, 제자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다 보면 더욱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대하시는 모습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 길은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머리에 쓴 가시관이 찌르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혔습니다. 나중에 창에 찔리셨습니다. 온 몸에 있는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시고 고통스럽게 오랫동안 고난과 핍박과 모욕을 받으며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예수님은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보겠다는 어떤 몸부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욕을 더 심하게 합니다. 어쩌면 자신을 버린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인간의 모습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의 모든 말을 다 들었지만,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과 억울하다며, 직접 싸우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을 향한 원망이나 저주의 말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부분은 시편 22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이 시편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대로 예언되어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신 걸 하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 (시편 22:6-8, 18)’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조롱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자신이 어떤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아셨지만,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말씀을 통해 나무에 달려 죽은 자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렵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아리마대 요셉이 저물 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 것도 이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저주 받은 자의 죽음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수 많은 병자를 돌보고, 치유하고 그들의 영혼을 돌아보았던 일들 마저도 부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 받은 자가 묻힌 무덤이기에 예수님의 무덤은 또한 저주 받은 무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억울하고, 가장 절망스러운 그런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4.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반전이 시작됩니다.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무덤이 빈 무덤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무덤은 죽은 사람이 누워 있었던 곳을 말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 나면, 그곳은 무덤이라 부르지 않고 동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덤에 누우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완벽하게 죽으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들려준 복음은 이것입니다.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이 소식에 너무 놀라서 제자들에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보다,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소식이 더 놀랍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빈 무덤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저주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몸이 되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 인생의 끝도 더 이상 무덤이 아니라는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덤도 예수님의 무덤처럼 결국 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종착역도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 무덤은, 또한 우리가 열심히 이 땅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봉사를 하고 구제를 이유는, 죽음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죽어서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끝이 무덤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인생의 끝이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며 주님과 함께 하시라고 말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빈 무덤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것입니다. 또한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 기독교가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12 -19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도하는 것도 헛된 일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된 일이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다 망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도망가기 바빴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다가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새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더 이상 주님 안에서는 저주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부활로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능력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가 말씀하신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도 가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로 먼저 가신 것은 죽은 자 같이 된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로 갈 때 입니다.
죽음을 지나서, 부활을 경험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 일 이후에, 성령 충만함으로 주를 위해 일했습니다. 죽음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담대히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아멘!
죽음은 반드시 옵니다. 멈추고 싶어도, 외면하고 싶어도, 반드시 찾아옵니다.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고, 서서히 찾아오기도 합니다. 준비해도 찾아오고, 준비하지 않아도 찾아옵니다. 우리도 무덤 속에 묻힐 것입니다. 이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사망을 이기게 됩니다. 우리의 무덤도 빈 무덤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이 시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