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응답자 10명 중 8명이 ‘부모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조사 결과를 보면 아이들이 제법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 다음으로,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대화를 한다가 55%로 가장 높았고, 스킨십, 선물, 전화와 같은 답변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들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다음 질문으로 부모님께 고맙다, 사랑한다 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답으로 하루에 여러번 한다가 50%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4%정도, 아무 말로 하지 않는다도 11%가 나왔습니다.
이런 통계 자료를 보면 세대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이런 조사를 했다면 부모님에게 ‘고맙다, 사랑한다’이런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답이 다수를 차지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랑 표현은 아이들만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어른들도 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축복하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으면 합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이 되도록 말입니다. 즉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기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우리가 서로에게 준 사랑이 험하고 거친 세상을 이겨내고, 외로운 세상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한다’ 고 말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을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아직은 쑥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저도 훈련이 많이 필요합니다. 또한 가정에서도 부부끼리, 부모와 자녀까리 서로 사랑한고 많이 말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글이 있습니다. 고 김준곤 목사님의 예수칼럼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랑은 주면 줄수록 커진다. …이 세상에는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사랑을 받을 필요가 없을만큼 부요한 사람도 없다. 사랑은 반드시 물질만은 아니다. 남의 고통과 상처에 내 피부를 맞대주고 곁에 있어 주는 사랑을 베풀자”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해야지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야 하겠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엉뚱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면, 사랑은 항상 의로움, 정의, 거룩함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한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에게 모래를 뿌렸습니다. 모래가 여자 아이의 눈에 들어갔는지 여자 아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남자 아이의 엄마가 당황하며 말합니다. ‘어머, 어쩌나, 괜찮니? 애야 울지 마렴. 우리 애가 네가 좋아서 그렇게 한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여자 아이의 엄마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자 아이의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남자 아이의 엄마의 말을 어떻게 들으시고 해석하셨나요?
어린 아이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 반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아이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어려서 사랑을 잘 표현할 줄 몰라서 생긴 일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남자 애에게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가르쳐 주면 됩니다. 또한 여자 아이에게는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겠지요.
그런데 남자애 엄마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 줄 아시나요?
사랑하지만 표현이 좀 거친 것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조금 아프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뿌린 모래니까 참으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남자 아이는 이 일을 통해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래를 뿌려도 된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요?
이런 일들은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로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른들의 세상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소위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이 그 예입니다. 뉴스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런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시나요?
그들은 “사랑해서 한 일”이라고 한결 같이 말합니다. 사랑해서 때리고, 사랑해서 욕하고 협박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애인 관계에서 부부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다툼을 넘어서는 폭력인데도, 우리는 이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사랑일까요? 정말 사랑해서 한 일일까요? 사랑하면 이렇게 해도 되나요? 아닙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불의를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있는 중이고,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단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한 것일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은 매우 다양합니다. 감정적 폭력, 성적 폭력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디지털 폭력도 있습니다. 인터넷, 친구 관계들에 간섭하거나, 아이디와 비밀 번호를 공유하기를 강요하고, 즉각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경우가 이에 속합니다. 우리는 폭력을 사랑이라고 읽으면 안됩니다. 폭력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듣지 말아야 합니다. 폭력은 사랑이라고 쓰여 있어도 우리가 죄라고 읽어야 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진짜 사랑을 구별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잔이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친구야, 너 나 사랑하지?’ /그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맞다, 나도 너 억수로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럼 내 부탁 좀 들어줘요/ 무슨 부탁?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누가 전화해서 어제 내가 너랑 같이 있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 좀 해 줘라.
수잔은 지금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서 친구의 거짓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수잔은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이니까, 거짓말을 좀 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부탁을 받으면 참 곤란하겠지요? 잠시라도 고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사소한 거짓말은 해 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버린 지금, 우리는 금방 알아 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수잔의 부탁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수잔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자기의 욕심을 가리우고 싶은 것 뿐입니다. 이런 사람이 친구라면 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에게 불의한 일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시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불의한 것을 행하도록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나에게 불의한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도 좋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은 불의를 행치 아니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과 6장에 자세히 기록해 놓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냐 하면,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처와 간음을 했습니다. 교인들이 서로 법적 소송을 하면서 서로 속이기도 했습니다. 우상 숭배도 하고,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모두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벌인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벌인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불행히도 현대의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 일들을 보면, 참으로 참담하고 부끄러울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항상 정의와 거룩함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으로 위장한 것 뿐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을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사랑을 말하지만, 삶에서는 불의를 행하고 진리를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린 교회는 사랑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사랑은 거룩함, 진리와 의와 함께 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부하가 죽도록 했습니다. 이 일이 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이 한 일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하신 일은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나요?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의롭고 정의롭고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윗이 목동일 때도 그랬고,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그가 정의롭고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거룩하고 의롭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요?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의로움과 거룩함과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은 찬란한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동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혹시 우리는 사랑을 남용하고 있지 않나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가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무례하게 행한 적은 없나요?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한 적은 없나요?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불의를 행하도록 강요한 적은 없나요?
주님 혹시 우리가 그랬다면, 저희로 그것들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가 교회에서만 거룩하고 의롭고, 세상에서는 더욱 불의를 행하고 있지는 않았나요? 그렇다면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리고 저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룩함으로 이 땅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곳에 모인 주님의 자녀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