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
셀레스트 해들리의 [말 센스] 라는 책에서 대화 나르시즘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사회학자 찰스더버가 만든 용어인데요. 사람이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대화를 이끌면서, 대화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 놓고자 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런 욕망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는데요. 책에서 소개하는 예가 있습니다. 매우 짧은 대화입니다. 메리와 팀이 서로 이야기합니다.
메리: 나 지금 너무 바빠, 팀: 나도 지금 정말 정신없어.
이 둘의 대화에서 뭔가를 발견하셨나요? 무슨 상황인지 아실 분도 있으실텐데요. 어째든 다른 대화 내용도 한 번 들어보세요.
메리: 새 신발을 사야겠어, 팀: 내 신발도 다 낡았어.
메리가 말을 하면, 팀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친구와 가족 사이에서 오고가는 평범한 대화일 수 있는데요. 엄밀히 따지면, 메리와 팀은 대화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팀이 한 말을 분석해 보면, 대화의 초점을 자신에게 옮겨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이것이 대화 나르시즘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제가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금했어요. 제가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그랬구나. ….대화가 없었구나.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은데, 진정한 대화가 없었구나”하는 것입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관심을 나에게 계속 돌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얼굴이 발개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책에서 배운 대화 방법은 이것입니다. 지지 반응이라고 하는데요.
이번에는 메리와 마크의 대화 입니다.
메리: 나 지금 너무 바빠! 마크: 왜 ? 해야 할 일이 많아?
짧은 대화지만, 메리와 마크,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렸던 메리와 팀의 대화의 차이를 아시겠어요?
팀은 대화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렸는데요. 이와는 달리, 마크는 메리에게 대화의 관심을 계속해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크는 상대방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많이 되어서 여러분께 소개햏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친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대화가 오고 가기를 바랍니다. 지지 반응. 오늘 한 번 연습해 보시기 바래요. 대화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2.
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기도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지금 다소 사람 사울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주목하시는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난생 처음 하나님께 드렸던 진정한 의미의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 이해하려면, 다소 사람 사울의 배경을 좀 알아야 합니다.
아시다피시, 다소 사람 사울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던 사람입니다. 경건한 바리새인은 기도를 참 많이 했다고 하는데요. 하루에 세 번 세시간씩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도 서서 기도했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다소 사람 사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는 것에 수 많은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규칙적으로, 습관을 따라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양도 어마 어마 하지요. 그런 사람이 사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기도했는지는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을 얼핏 들으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도 했습니다. 거기에 그들은 드리지 않아도 되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을 주님이 꾸짖으셨어요. 왜냐면, 그들은 “자기는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자기 자랑에 빠진 기도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목 받고 싶은 기도였습니다. 기도 나르시시즘에 빠진 겁니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을까요? 주님이 그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있는 것을 아셨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기도하고 있는 중이다!’ 라고 말이지요. 대신에, 주님은 그들은 자기 자랑하는 중이다. 그들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를 혐오하고 있다. 라고 하십니다. 다소 사람 사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는 예수를 미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에 세 번 세 시간씩 기도했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많은 시간 기도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도 기도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문장으로 이루어진 기도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실 기도. 하나님이 주목하시지 않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많이 기도했지만, 기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많이 대화 했는데,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이루어진 적이 없었던 겁니다.
요즘으로 따져보면,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는 어떤 분이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합니다. 한 번 기도하면 몇 시간씩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 분의 마음에는 미움이 가득차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도 시간이 되면 다시 열심히 기도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열심입니다. 하나님이 이 분의 기도를 들으셨을까요? 하나님이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말씀해 주실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는 많이 했는데, 진정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허망할 것입니다. 화가 날지도 모릅니다. 나는 열심히 했는데, 아무 것도 안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유해서 말하면, 기도는 화살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은 화살을 많이 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살이 모두 다 과녁을 빗겨나갔습니다. 하나도 과녁에 맞지 않고 빗겨났습니다. 기도한 건가요? 그냥 푸념거리를 늘어 놓은 걸까요? 화살에 과녁에 맞지 않으면, 화살을 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과녁에 맞지 않는 기도는,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점수를 받지 못합니다. 빛 되신 예수를 만나기 전에, 다소 사람 사울이 했던 기도 생활이었습니다.
그랬던 다소 사람 사울의 기도가 드디어 과녁에 맞았습니다. 주님이 ‘명~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중이니라’라는 말씀이 그것잉ㅂ니다. 주님이 드디어 사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해 주신 말씀이니, 이 말은 사울이 거듭났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울이 예수를 믿고 진정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는 사실은 사울의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드린 진짜 기도를 의미합니다.영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에게는 영광스런 말이기도 합니다. 그의 기도에 대해 처음으로 듣게 된 하나님의 평가였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평가. 위대하시고 강한 주님의 평가이십니다. 주님이 이 기도를 주목하셨습니다.
주님이 사울의 기도를 주목하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해 주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어디지요? ‘직가라는 거리였습니다. 주님은 또한 사울이 누구의 집에서 있는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유다의 집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그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만나라고 하시면서, 그가 기도 중이라고 분명히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길에서 기도할 수 있어요. 길가에서, 교회 예배당에서, 운전 중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겁니다.
또한 주님이 그의 기도를 주목하신 이유는, 그의 기도가 세리의 기도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욕먹는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들입니다. 평생. 아니 자손 대대로 욕을 얻어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세리는 감히 하늘을 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기도는 마음이 낮아진 사람이 합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죄악을 깨달은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영으로 기도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주님이 주목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는 세리를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라고 하셨습니다. 세리는 구원이 이르는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신 사울의 기도도 세리의 기도를 닮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골방에서. 눈은 떴지만, 보지 못하는 사울이 가슴을 치며 했을 기도였을 겁니다.
사울이 깨달은 죄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지 못한 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핍박한 죄. 그를 믿는 사람들을 미워한 죄. 그들을 잡아서 핍박한 죄. 성령을 거슬린 죄. 하나님 아버지의 길을 막아선 죄…..이렇게 셀수도 없는 죄들을 깨닫고, 끝이 없는 죄의 목록 앞에서, 마음 속에 악한 것 뿐임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을 겁니다. 그의 기도는 사무엘서 나오는 한나의 기도를 닮았습니다. 소리도 못내고, 입만 우물쭈물하면서 드리는 기도 말입니다. 남들이 보면 대 낮부터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하기 좋은 기도. 침묵. 절대 침묵.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눈 먼 사람의 기도에 주님이 주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상한 마음으로,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와 진심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처음으로 드렸던 이 기도가 주님을 춤추게 했을 겁니다. 주님은 사울의 기도를 기뻐하신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아니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여러분의 귀에도, 이런 주님의 기쁨이 들리시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온 날, 주님의 과녁에 기도가 제대로 꽂힌 날,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아멘.
3.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떨까요? 우리도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훈련이 됩니다.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금식도 해야 합니다. 올해는 금식을 반드시 했으면 합니다. 2020년 2월 26일이 바로 그날입니다. 컴벌랜드 교단에서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전세계 성도들이 금식하며 함께 기도하자고 정한 날입니다. 2020년 2월 26일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날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교회력의 절기입니다. 이 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재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40일간 묵상합니다.
금식의 날에 우리 모두가 한끼도 좋고, 두 끼도 좋고, 하루 종일 금식해도 좋습니다. 물을 마시면서 하셔도 되고, 음료수를 마시면서 하셔도 됩니다. 사울처럼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기도가 영으로 드리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주일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 신경을 암송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스크린에 적힌 것을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저희들이 사도신경을 반복적으로 읽는 이유는, 그 안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져 있어서 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복음의 말씀이 새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꾸만 반복해서 읽습니다. 이렇게 수 백번 아니 수천번도 반복해서 하는 건데요. 주님께 우리가 올려드린 수 천번의 고백이고 기도인 셈인데요. 우리가 주의할 것은,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없이, 건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요? 읽으나 마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지기도 않습니다. 화살이 과녁을 빗겨나간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영으로 사도신경으로 주님께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기도의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소용 없습니다.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함께 읽을 때, 한 구절 한 구절을 묵상하시듯이 마음에 새기듯이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읽는 한 구절 한 구절이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중이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칭찬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쁨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세리처럼 기도했을 때.
다시 말해 경건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주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기도를 드릴 때,
주님을 의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우리의 기도도 ‘주님이 주목하시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그랬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도 제 기도 생활을 점검해 봤습니다. 건성으로 하는 기도는 없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기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기도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이나,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기도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시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주님이,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4.
주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셔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실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드리는 기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우리 자랑으로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을 치며, 우리의 죄악을 깨닫게 된 기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기도는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드리는 깨달음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빛으로 눈이 멀어버린 사람이 겸손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높아진 마음이 낮아져서 하는 기도입니다.
깨어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예수를 전파하는 자로 거듭나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긍휼이 여겨주시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내 죄악을 말갛게 씻어주시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사명을 주시는 기도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을 경험한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이런 평가를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빛 되신 주.
빛을 들고 세상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