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에, 톨스토이는 그의 작품에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람은 오로지 사랑과 선행을 행하며 사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의 크리스챤들이 새겨 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톨스토이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으면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됩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닮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
.. 그래요… 사도 바울은 사랑을 성내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접하면서, 제가 조금은 혼동스러웠습니다. 살다보면 화 날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더욱 곤란했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난 몇 주 동안 개인적으로 화가 많이 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몇 몇 학생들 때문에 화가 좀 날 때가 있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화를 낸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나서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는 말씀이 머릴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참 괴롭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화 낼이 거의 없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화 날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설마, 저만 화 내는 건 아니겠지요??? 어째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화가 나 있는 제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2.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장면을 접하게 됩니다. 몇 주 전부터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는데, 하나님의 분노하신다는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분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닌 강도의 소굴로 바뀌었다며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 예수님의 분노에 대한 글을 읽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헛갈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화 내도 될까요? 아니면 참아야 될까요? 참으로 복이 온다는 우리 말도 있잖아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런 고민들을 여러분과 한 번 해 볼까 합니다.
먼저 화라고 하는 감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따라서 화를 내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화를 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화는 죄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경우는 이럴 때 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누군가 강요할 때, 뻔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화가 납니다. 그리고 화가 나면 누구든지 무섭습니다. 평소에 화를 거의 안 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더욱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사람이 화를 내도 무서운데,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면 훨씬 더 두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화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힌트는 말씀 속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서 화가 날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유익만을 구하려고 할 때 그렇습니다. 특히 자기 욕심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화가 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무례히 행하고도 너무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들이야기도 우리를 화 나게 합니다.
신문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한 여성 분이 화가 엄청 많이 나 있습니다. 자신을 성추행하고 성폭행하려고 했던 학교 선생님의 말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이신 그 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러니 너도 나를 정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 말에 인터뷰를 한 여성분은 화가 나서 기독교를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가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화를 내기도 합니다. 특히 자기의 유익을 해치는 일이 일어나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자기 유익을 위해 화를 내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 욕심을 위해 내는 화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화 내는 장면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첫번째 아들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언제 그가 화가 났냐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직후에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가인은 화가 났고,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이는 끔직한 일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살인을 한 사람의 이야기와 같이 황당한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귀던 여인이 헤어지자고 하자 격분한 남자가 여인을 납치해서 끌고 다닌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차 경적을 올렸다고 그 차 앞에 끼여 들여10여차례 급정차로 위협하는 사건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는 눈으로 봤다며 화가 나서 때린 사건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해 보이는 사건들이지만, 사람들이 화가 나서 이렇게 죄를 짓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화를 내는 경우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의미가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서 틈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화 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문에서 읽는 기사들은 화를 내다가 마귀에게 틈을 보여 인생을 망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일이라도, 그 속에는 자기 유익만을 채우기 위해 화를 내다가 죄를 짓게 된 경우입니다. 마귀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내는 화를 이용해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나아가 화 내고 있는 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버립니다. 화가 나도 죄를 짖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것은 또한 화가 난 상태를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게 돼서, 결국 우리를 망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 예수님의 분노, 그리고 사람의 분노의 차이가 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분노하시는 이유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단어는 화를 조금 내는 것이고 진노는 콧김이 나올 정도로 크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노하신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헛된 우상을 버리고, 헛된 인생을 살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값진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분노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분노에는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화를 내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로 하여금 정의롭게 거룩하게 살게 하려는 의도가 예수님의 분노에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화는 그 사람을 살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따라 내는 화는 마귀에게 이용당하게 되어 있음을 성경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화를 내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모님들이 화를 냅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내는 화 속에 부모의 욕심이 끼여들게 되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오직 너희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짖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을 내어도” 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주목해야 하는 말들을 있습니다. 어떤 말들이냐 하면,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우리는 지체이다’ 와 같은 말들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으면 우리가 내는 화가 마귀에게 틈을 주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화가 나도 죄를 짖지 말고, 해가 지면 화를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으면 화가 마음에 쌓게 되고, 언젠가는 화가 폭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가 지지 않도록 분을 품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께 우리의 원수를 맡기는 것 뿐입니다.
느헤미야도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고 했을 때, 이를 방해하는 원수들을 향한 기도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 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라”
화가 나면 풀어야 합니다. 어떻게 풉니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풀었습니다. 시편 58편에서도 화가 많이 난 한 사람의 기도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꺽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꺽어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꺽임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참으로 무서운 기도 아닙니까! 그렇지만 시인은 자신의 화가 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화를 내도 죄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토해 내고,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속상한 마음을 아뢰시길 바랍니다. 시편 기자처럼 기도해도 됩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해도 됩니다. 저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우리 욕심이 자꾸만 우리 상황에 개입하기 때문에 죄를 짓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우리의 욕심을 감추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속상한 마음을 주님께 아룁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그대로 보여드리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우리의 모든 마음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 주님께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실 것입니다. 속상한 마음, 화난 마음도 주님이 만져 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도 제 마음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제 마음을 만져 주셔서, 평안을 주시옵소서. 분을 내어도 죄 짓지 말게 하옵소서. 또한 해가 지기까지 분을 품지 않도록 주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