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한 이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53-58)’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보고 자란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 따랐던 수 많은 사람들에게도 걸림이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의 제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말씀은 걸림이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잔인한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이 성경에 나옵니다.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사람들이 냉정해 진 것일까요? 말로 안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소망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만 하지 않으셨어도, 수 천 명의 군중이 예수를 따르고 열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어코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 천명의 제자들을 예수님이 잃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걸림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내가 충돌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충돌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이런 때에 어떻게 하시나요? 진리가 자꾸 걸림이 될 때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 본문에 있던 수 많은 사람들은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일이 잘한 선택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길은, 정말 옳은 길일까요? 이런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걸림이 된다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던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가요? 예수님의 자리와 내 자리가 어디에 있는 가? 누가 내 마음 속에 있는 왕좌에 앉아있는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베드로 같은 제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도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내가 주를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걸림이 되었지만, 베드로에게는 영생의 말씀으로 들린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에게도, 베드로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게 있으니 내가 주를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생명의 근원 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를 떠나지 아니하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2.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사도 요한이 선포했던 것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하는데 떠 올랐던 성경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말씀을 먹고 마신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진리는 자유를 줍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떠났습니다. 예수라는 말씀을 먹지 못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음식이 전세계적으로 유행입니다. 그 중에서도 김밥이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김밥을 먹는 것이 스시 먹는 것보다, 더 우아하고 고급스럽다는 이미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김밥을 먹으면서, ‘너무 맛있다’는 말을 해 주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 사람들이 정말 먹고 싶은 음식 중 하나가 김밥이 되었으면 합니다. 벌써 배가 고프시지요?
전 세계 사람들이 김밥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만큼 한국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고, 그 만큼 한국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문화를 먹고 마시면서, 한국이 그들의 삶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음식은 먹는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인정하고, 함께 있고 싶어하고, 삶을 나누고, 어쩌면 감정과 사상과 역사를 나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나라의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이 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먹는다는 것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좋아하고, 예수를 알고, 예수가 진리이며, 예수가 생명이고, 예수가 떡이고, 예수가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밥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를 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삽니다. 영생의 말씀이 예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판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걸어간 길과 가룟 유다가 걸어간 길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 다 예수를 먹은 사람들 아닌가요? 예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3년 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 두 사람은 그렇게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 두 제자들 모두가 같은 고백을 한 것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6:68)’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똑같이 고백했는데, 나중에 보면 결과가 달랐습니다.
물론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잡혀가실 때 열두 제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 드렸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둘 다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저주까지 했습니다.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국 예수를 위해 살다가 죽었지만, 가룟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도대체 이 둘의 차이는 뭘까요?
말씀을 묵상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예수라는 말씀을 진짜로 먹고 마신 사람과 먹는 시늉만 한 사람의 차이라는 생각입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의 생각을 따를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가 꿈꾸는 세상, 그 세상을 예수로 인해 펼칠 수 있을까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자신의 꿈을 이루는 도구로만 생각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예수는, 자신의 성공에 필요한 존재, 돈을 버는데 필요한 존재, 명예를 얻는데 필요한 존재로만 여긴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말씀이신 예수를 먹은 것이 아니라, 먹는 척 한 것 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고급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게 가룟 유다가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 저 돈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게 낫지 왜 낭비를 하느냐’고 합니다. 정의를 외치는 것 같고,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를 먹는 시늉만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의 제자로 보여지고 있었지만, 예수의 진짜 제자는 되지 못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그것이 육신이 되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자신의 삶이 된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이 우리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 그대로 녹아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때로는 넘어집니다. 베드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도 넘어졌습니다. 두려운 현실로 힘겨워했습니다. 예수가 잡히시던 밤에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연약했지만, 여전히 예수를 먹고 마셨던 사람입니다.
우리도 연약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말씀이신 예수를 먹고 마시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이어스 J-US의 찬양곡 중에 ‘말씀이 육신되어’라는 찬양이 있는데요. 나중에 배워서 함께 불렀으면 합니다.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모든 어둠 이기고 영원한 생명되신/하늘의 통치자 이 땅에 임하셨네/어둠을 밝히시고 죽음을 이기신 주/내 안에 오셔서 주의 뜻 이루시네/하늘의 통치가 온 땅에 충만하네/ 주님의 영광 내게 임하네/주의 성령 날 이끄시네/주의 말씀이 날 찾아오셔서 다스리시네/온땅 비추시네.
말씀이신 예수를 먹고 마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래서 주님의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