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먹고 즐기자! 라는 말은 기쁠 때, 감사할 때, 기념할 일이 있을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침 오늘 같은 날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주는 한국에서 추석 연휴입니다. 한국에서 추석은 대표적인 명절 중 하나이고, 한가위라고도 불립니다. 아시다시피 추석은 가을 수확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풍성하게 음식을 차리는 것도, 가족 친지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즐기는 점도 비슷합니다. 항상 배고팠던 시절에는 추석이 그래서 더욱 특별한 축제 날이었을 것입니다. 마음껏 먹고 배고픔을 잊었던 날이고, 거기에 음악과 춤이 있어서 더 흥겹고 즐거웠던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을 위해 음식을 마련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은 그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먹고 즐길 수 있는 풍성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식사 기도를 지금해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
오늘 읽은 본문에도 잔치가 있었습니다. 어떤 잔치였을까요? 추석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초대된 엄청난 마을 잔치였습니다. 이 잔치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데요. 바로 돌아온 탕자를 위한 잔치였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을 위해 이렇게 거대한 잔치를 벌려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탕자라고 불리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방탕하게 쓰다가 졸딱 망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위한 잔치가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집에 돌아왔을 때, 탕자의 아버지가 그를 맞이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20절을 보시면,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둘째아들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탕자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래서 탕자의 아버지는 그가 돌아올 길을 매일 바라보던 습관 아닌 습관이 있었던 듯 합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그렇지만, 돌아온 탕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반은은 다른 집 아버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둘째 아들도 18절과 19절에서 연습했던 말을 다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하지 못한 이야기는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종들에게, 22절에 나오는 명령을 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취했던 네 가지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
둘째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
셋째 발에 신을 신기라.
넷째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집 나가서 망해서 돌아온 아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형편 없었습니다. 따라서 탕자의 아버지가 종들에게 하는 말들은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현재의 우리는, 현대라는 시대 배경에서 비유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탕자의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종들에게 언급한 4개의 명령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2.
먼저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요.
탕자는 별로 안 좋은 옷을 입었다. 가락지(반지)가 없다. 발에 신발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발이 아주 흔한 물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발이 없다는 생각은 거의 못합니다. 누구나 신발을 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신발이 귀한 물건 중 하나 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았던 종이나 품꾼들은, 대부분 신발 없이 맨발로 걸어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신발은 ‘신분’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고, 신분이 있어야 신을 수 있는 것이 신발이었다는 것읍니다. 그러니까, 탕자의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신발을 신기운 것은, 이런 말이 됩니다. 탕자를 품꾼의 하나가 아닌, 자기 아들로 다시 받아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아버지의 행동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속상하게 했던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린 즉각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매우 드문 경우이기도 합니다.
아들에게 신발을 신기우라는 명령과 유사한 것이 첫번째 명령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내어 다가 (둘째 아들에게) 입히라’고 했습니다. 그 옷이 어떤 옷인지 알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옷일수도 있고, 예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으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무슨 일을 하실 것 같으세요? 바로 깨끗하게 몸을 씻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옷에 걸맞게 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 말 속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둘째 아들의 모양은 형편 없었습니다. 돼지 키우는 곳에서 일했고, 오랜 여행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굶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배고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탕자의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아들에게,황급히 옷을 입히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옷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높은 명예를 의미합니다. 탕자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힌 것은, 더 높은 명예롭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탕자의 모습은 수치의 자리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명예라는 옷을 입혀주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수치를 당하기 전에 아버지는 아들을 존귀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아버지의 행동이 구속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입혀 주시는 옷이 있지요? 바로 칭의와 용서의 옷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 61:10)’
‘죄인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입히시니’ 이게 바로, 탕자에게 아버지가 입히고자 했던 옷입니다. 가장 좋은 옷이, 구원의 옷이고 공의의 겉옷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마음 속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죄인들이 이렇게 좋은 옷을 입으려면, 먼저 깨끗히 씻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지금보다 좀 더 착하게 살다가, 지금보다 더 의롭게 살다가,그래서 좀 더 깨끗해 지면, 나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옷을 입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하나님 아버지가 기대하고 있으실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는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더러운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구원의 옷, 칭의의 옷을 입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들은 복음이며,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입니다. 우리가 가끔은 구원의 옷, 칭의의 옷을 입었다고 자랑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탕자처럼 냄새나는 헌 옷을 입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는 둘째 아들에게는 과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세번째로 준 것이 있는데, 가락지(반지)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지는 보통 반지가 아니라, 인장 반지입니다. 인장 반지는 계약서를 쓸 때 사용하는 도장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탕자 아버지가 지금 둘째에게 주는 반지는 권위와 권력을 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탕진한 아들인데, 그런 과거가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인감 도장을 맡긴 것입니다. 아들이 받은 반지와 관련해서, 이 반지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다른 성경 내용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42장에 보면, 바로가 요셉에게 준 것이 바로 인장 반지였습니다. 왕의 권위와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 ‘반지’입니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그러니까, 탕자의 아버지가 둘째에게 해 주고 있는 것들은, 둘째가 아들의 지위를 온전하게 회복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성령께서 인치심으로 확증된 것과 같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
여기서 말하는 인치심이, 바로 인간 도장으로 직인을 찍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탕자의 아버지가 얼마나 넉넉하고 풍성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둘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탕자의 아버지가 잔치를 열겠다는 의미입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살진 송아지는 그 때 당시 100명에서 2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탕자의 아버지가 열려고 하는 잔치의 규모가 어마 어마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큰 잔치를 열까요?
이것 또한 둘째 아들을 배려한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는 이유는 뭘까요? 뭔가를 축하고,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궁긍적으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탕자가 마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안아 주고 입을 맟춤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 다음 탕자의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자기 가문의 인장 반지를 주고, 신발을 신겨 주고, 잔치를 열어 줌으로, 둘째가 다시 자기 아들로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오늘까지의 내용입니다.
이런 아버지가 현실에 존재할까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들을 마지 못해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들이 돌아왔을 때, 죄인들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용서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분입니다. 그 뿐 아니라, 죄인을 의롭다 해주시고, 아들이라 불러 주시고, 그를 위해서 잔치를 열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잔치의 모습이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이 잔치의 이유는, 24절에 보면,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구원의 잔치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 하더라’
이런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와 우리 공동체에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