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마지막 주에 있었던 일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예수님은 성전에서 성경을 가르치신 일입니다. 또한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이들이 했던 질문들은, 영적인 권위과 세상 권위, 부활에 대한 질문, 그리고 율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율법학자가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이 주신 대답은 ‘사랑’ 이 가장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둘째 되는 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요약해 주셨습니다.
이 대답은 또한 예수님 생애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우리의 이웃이 되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십자가’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시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정신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내용을 사랑으로 요약하신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시편 말씀을 통해 밝히십니다. 그리서 나서, 예수님이 무리와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원색적인 비판이 실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었다면, 당사자들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했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비판은 이런 것입니다.
첫번째, 대접 받고 싶어 하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둘째, 말만하고 행치 않는 것입니다.
셋째, 위선적인 모습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5)’
넷째, 뒤집힌 영성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효한 맹세’와 ‘유효하지 않은 맹세’를 구분했는데요.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 안에 있는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놓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판을 짧게 요약했지만, 이런 예수님의 비판에,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대접받고 싶어하고, 말만하고 행치 않으며, 위선적인 모습이 있고, 영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나 유튜브에서 본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말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에 빠져도 입만 물 위로 둥둥 떠 다닌다고 빈정거립니다.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말을 빌리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말만 잘하는 싸움꾼으로 여기는 것은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다’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말만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하는 말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행함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말만 하지 말고 행함으로 증명하라는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보고 싶은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인종이 다르다고, 풍습이 다르다고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Civil Right Museum에서 갔는데요. 그곳에 본 표현이 있습니다. ‘I am Man’입니다. ‘사람으로 대접해 달라. 나도 사람이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이 유독 다가왔던 한 주간입니다. 사람은 사랑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지러운 요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런 시대일 수록,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보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인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입만 열면 사랑을 말하는 우리에게 실제로 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 동안이라도, 우리 안에 사랑을 제일로 여기고 사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면 떠 오르는 성경 장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세상은 이 중에 사랑에 가장 목말라 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온 교회에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으면 합니다.
왜 이게 중요할까요? 사랑은 화목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8, 19)’
2.
빌립보서 4장 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 두 사람을 꼭 찍어서, 이런 권면을 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이 둘의 사이가 나빴기 때문입니다. 서로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미워해서 마음이 하나 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두 사람이지만, 그렇게 싸우다보니, 빌립보 교회에 큰 시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싸울까요? 서로 자기가 맞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옳고 그른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옳고 그름을 정말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 안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옳고 그름만을 따지면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의 비판을 들은 그들 안에는 미움만 가득해졌고, 그들이 결국 예수를 못 박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 옳고 그름만을 따지면 정말 무섭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이 분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셨는데 지나치게 율법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해서, 며칠씩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라는 말씀을 읽고는 교회만 오면 울면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문자 그대로 믿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학생 눈에 보이는 교회 어른들은 한 결같이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 집사님은 이래서 문제고, 저 장로님은 저래서 문제고.. 그 목사님은 요래서 문제고. 고등학생 눈에 마음으로 존경하고 싶은 교회 어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교회 다니던 친구가 생활의 어려움과 여학생으로부터 실연당한 일로 음독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 학생이 병원에 있는 그 친구를 찾아가 했던 말이 이것입니다. ‘네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시험에 빠졌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부모님이 반대하며 등록금을 내주지 않아서 입학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크게 낙심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예수 잘 믿는 것 같았는데 한 번의 시험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몇 년의 방황 끝에 다시 예수님께 돌아온 그는 자신의 교만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족시켰는가를 깨닫고 통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신학교에 갈 수 있었고 마침내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랑이 많은 목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럴까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주는 목사가 될 뻔했는데,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는 목사가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본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새겨 들어야 할 부분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세리들과 창녀들로 표현되는 어쩌면 가난하고 형편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신 이유는’ 그들도 주님 안에서 변화된다고 믿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했고,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위해 기꺼히 순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인가요? 사랑이 제일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원색적인 언어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결국 그들에게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비난을 듣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신 것은 기도와 금식, 삶의 방향을 둘러싼 성경의 가르침들이 아니라, 문제는 영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을 따르는 행위를, 다른 이들과 하나님을 움직이는 도구로 삼으려는 신앙인들의 성향’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은 누구보다 많이 기도하고 금식하니까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고 영향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이 비판하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백성들에게 짊어지게 한 짐은 ‘율법의 무거운 규례’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바탕으로 613개나 되는 수 많은 계명을 만들어냈고, 백성들에게 이를 엄격하게 지키도록 강요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규칙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 위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마 23:4)’
예수님의 눈에 보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이렇게 말만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을 비판한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삶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 지우시지 않으십
니다. 대신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덜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에서 덜어주신 가장 무거운 멍에는 ‘죄’입니다. 죄의 무게는 우리가 짊어지고 다니기에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보면 양이 털 깍는 자 앞에서 입을 열지 아니함과 같이 잠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는 말씀은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 모두가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세상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요즘 제가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우리 이웃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주님이 제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냥 그래 보여도, 멋지게 훌륭하게 자랄 거야~’
이렇게 되새김질을 하면서 학생들 시험 점수를 매깁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들을 이런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라. 낮아져라. 말만 하지 말고 삶으로 증명해라. 핵심을 놓치지 마라”
근데 이 모든 것이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주님이 교회에 주신 소명입니다.
오늘 살펴본 예수님의 책망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걸어가신 길에서 만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랑하사, 그들에게 ‘사랑없는 정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하시길 원하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이 책망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으로 들을까요? 아니면 극한 미움으로 들을까요?
주님의 책망도, 예수의 마음에 담겨 있는 사랑으로 들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