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시작하면서, 신년특별기도회를 했습니다. 일 주일 동안 매일 모여서,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눴습니다. 룻기 1장과 2장을 묵상하면서, 2025년 우리 공동체가 적용했으면 하는 구호가 분명해 졌습니다. 주보에도 적어 놨는데, ‘삶으로 증명하자’ 로 정해 봤습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우리 공동체가 적용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증명하라’는 것이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될 것입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그 의미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신년특별기도회에서 나누었던 내용을 정리하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룻기서는 엘리멜렉과 나오미와 두 아들이,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이사가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은 상식적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의 이사는, 흉년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원하는대로 문제가 해결되되지는 못했습니다. 집의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두 아들도 장가를 갔지만, 무슨 이유인지 죽었습니다. 이제 나오미만 혼자 살아 남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의 입을 빌리면, ‘풍족했는데, 인생이 텅 비어 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이 말로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빠져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미의 귀에 들린 소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베들레헴도 살 만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을텐데,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라는 말로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 는 소식은, 나오미에게 소망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인생이 텅 비어 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채워주실 것이다는 소망입니다.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입니다. 나오미는 이 말씀을 붙잡고, 베들레헴으로 가고자 결심합니다. 여러분도,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소망과 믿음을 붙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하면, 결심하게 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을, 여러분의 소망을 증명해 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진짜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텅빈 인생을 채워주실까요? 그걸 알려면, 결심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2.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동기는 딱 한가지 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삶에 대한 믿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사 양식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오미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오미에게는 베들레헴에 간다고 해도, 특별한 대책이 없습니다. 아주 막연하고, 아주 불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돌보실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2024년을 살아온 것도, 무슨 대책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찌 어찌 살았는데, 일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20년이 되고, 40년이 되고, 60년이 되고, 80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있다는 것에 보태기(더하기),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 보태기, 하나님으로 인한 믿음이 있으면 금상첨화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오미가 가진 것입니다. 우리도 있었으면 합니다. 없다면 주님께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게 소망과 믿음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하나님으로 인한 믿음을 가지고,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에게는 룻이라고 하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죽음이 그들을 갈라 놓을 수 없다는 충성 맹세까지 했습니다. 나오미에게 룻이 얼마나 힘이 되었을 지, 위로가 되었을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방 여인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했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룻기 1장 16절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한 것입니다. 룻의 이 고백은, 정말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왜 감동적일까요? 며느리가 시어머니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딸이 엄마처럼 되고 싶어 라고 말해도 감동일텐데, 며느리가 시어머니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니, 더 감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룻의 이 고백을 들으면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보여준 삶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나에게 쓰디쓴 인생을 맛보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의 하나님은, 나오미를 힘들게 하시는 하나님, 나오미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가시는 듯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말하기를,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고, 인생이 텅비게 된 시어머니 나오미, 모든 것을 보고 느꼈을텐데도,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오미가 모압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룻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오미처럼 살고 싶어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도 너무나도 아픈 기억이 있는 사람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성경은 나오마가 룻에게 행한 일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룻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습니다. 나오미가 삶으로 증명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을 알 고 있으시나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눈물로 밤을 지새고, 한 끼를 걱정해야 했던 시간을 보내신 분들을 압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저도 원합니다. 그 분들의 삶이, 제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 곁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룻기서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붙좆았다’는 말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던 룻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땅에 살러 간 룻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룻도 나오미에게 쓰디 쓴 기억만 남기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까요?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일들로,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보고, 믿음의 결단을 내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까요? 아니면, 고통과 고난으로 얼룩진 세월을 동일하게 경험하게 하실까요?
2025년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룻은 아무 것도 없는 시어미를 붙좇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룻을 붙좇아 주셨습니다. 룻기 2장은, 하나님이 룻을 어떻게 붙좇아주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3.
룻기 2장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예루살렘에 온 룻은 이삭을 주으러 밭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율법에는 가난한 사람들, 특히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가, 그들에게는 추수한 밭에는 남겨둔 이삭이 있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추수한 밭에 떨어진 이삭을 남겨 둔 사람들이 있을까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라는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인 사람들이 있다면, 룻은, 추수하는 밭에 가서 허탕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 뿐인 낯선 땅에서, 어디로 가야 하지 몰라 갈팡질팡할 수 있는 그곳이지만, 룻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사사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런 시대에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희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사시대 같은 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해 보여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헛된 희망이 아닌, 진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은 희망을 보게 됩니다. 바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모든 방면에서, 희망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기도했으면 합니다.
추수하는 밭으로 이삭을 주우러 가면서, 모압 여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룻기 2장 2절인데요.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이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은혜를 입어서 이삭을 줍는 것입니다’ 참 소박한 소망 아닌가요? 이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앞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가 은혜를 베풀어야, 떨어진 이삭을 주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이방인 이라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가난하다고, 구박받고 무시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여인 룻이 소망했던 것은 ‘누구에게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이 작은 소망은 이루어질까요?
2025년 우리의 소망 중 하나도, ‘누구’를 위한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은혜를 베풀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왜 우리가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냐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어쩌면 평생 우리는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압 여인 룻에게, 과연 누가 은혜를 베풀어줄까요? 우리 삶 가운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2025년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기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이삭 줍는 룻의 인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일용한 양식을 위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4.
작은 소망을 가지고 낯선 곳에 이른 룻이 게 된 곳은,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우연히 가게 된 곳에서 룻은 마침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우연이 반복되면, 우연이 아닙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가게 된 것은 룻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연과 마침으로 이어지는 우연의 반복을 통해, 여호와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모험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룻이 만난 보아스는 유력한 자였습니다. 부유하면서도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생각하고,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도 너무나도 잘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었습니다. 그것도 룻이 생각했던 보다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했던 말을 들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가 자기 밭에 이삭 줍기를 하러 온, 룻을 축복해 줍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도 따라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축복하며 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힘든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보아스 같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아스는 말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축복의 말과 더불어, 룻을 위한 조치들을 해 줍니다. 보아스가 일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룻기 15-16절: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보아스는 말로만 룻을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을 룻에게 흘러보냈습니다.
우리도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말로만 하지 말고 우리 주머니도 비워야 합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잘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보아스처럼 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축복을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2024년 우리 공동체는, 헌금의 16%를 선교비로 사용했습니다. 말로만 하지 않고, 우리 공동체가 삶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라기는, 2025년 재정보고를 할 때도, 우리 공동체의 축복이 이렇게 삶으로 증명되었으면 합니다.
보아스가 흘러보낸 축복의 결과가 17절입입니다.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한 에바는 약 22리터 정도되는 양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베풀어주신 은혜에, 룻은 성실함으로, 근면함으로 응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떨었습니다. 이삭을 떠는 방법은 돌 위에 이삭을 치는 것입니다. 저녁까지 최선을 다했고 마무리까지 하고서, 룻이 집에 돌아간 것입니다.
한 에바라는 양은, 룻이 생각했던 것보다, 룻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보리를 얻게 되었다는 놀라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라는 말은 놀라면서, 읽어야 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대충 20킬로그램이나 되는, 무거운 보리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룻은 어떤 마음일까요?
힘들어 주겠는데, 이렇게 많이 보리를 생겼다고 투덜거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추수하는 밭에 가서 이삭을 주우면 얼마나 주울 수 있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했었을 하루였습니다. 누군가 못 되게 굴 수도 있었습니다. 가난하다고, 어리다고, 여자라고, 이방인이라고, 핀잔을 받거나 위협을 받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 그렇지만, 룻이 그 무거운 보리를 들고 집으로 향하면서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보아스의 축복이 떠 올랐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게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나에게, 이렇게 큰 상을 주셨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날이 어두어지고, 차가워지고 있지만, 하루 종일 주운 무거운 보리에도 불구하고, 룻의 발걸음은, 가볍디 가벼웠을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눈물이 변하여 찬송이 되는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고백도 떠 올랐을 법 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은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가족과 친척을 떠나서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온 베들레헴에서 하루는, 이렇게 풍성함으로, 감사함으로, 마무리 되고 있음을 무겁디 무거운 보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2025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궁금해 집니다. 룻의 그 다음날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매일 이렇게 신나는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는 말씀을 룻이 매일 매일 경험했을까요? 아니면 오늘 하루만 어쩌다 생긴 일일까요?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미에게 임했던 것처럼, 여러분과 저에게도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소망과 믿음으로 다가오기를 기도합니다.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사람, 성품이 좋고, 믿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해 봅니다. 믿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흘러 들어오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보아스처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룻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는 사람들에게 흘러가길 기도합니다.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말만 하지 마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했으면 합니다. 삶으로 증명해 보입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축복하고, 그 축복이 우리를 통해 흘러갈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보아스처럼 말입니다.
2025년. 우리의 삶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을 통해, 룻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상급이 우리 각자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