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장은 장로의 유전과 하나님의 말씀, 수브리게아 여인의 믿음, 4000명을 먹이신 이적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습니다. 15장의 특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선민 사상으로 모든 민족보다 뛰어나다가 생각하고, 다른 민족들은 무시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비판하시고, 책망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반면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배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족 우월주의에 대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마태복음 15장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내용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한 것이다.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려움에 빠진 가나안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어조가 매우 거칠고,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기 싫으시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셔도 될텐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우리 안에 생길 수 있다. 사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인 명성도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할 말씀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26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가나안 여인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것도 큰 믿음. 무엇이 큰 믿음인가? 여인의 대답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여인이 이렇게 말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이 옳으시다. 주님이 항상 옳으시다.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든지 주님이 옳으시다. 이것이 믿음의 첫 단계이다. 그 다음 단계는 나의 모습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비굴한 모습은 아니지만, 주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내 삶의 문제는 해결 받지 못한다는 절심함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자녀의 떡은 먹지 못하더라도, 낮아지고 낮아진 나의 모습으로 주님이 주시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자세. 그 자세를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믿음이 크다? 는 우리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크다고 말할 때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을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 따지듯히 해서, 자녀로서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모습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은 클 지 모르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은 큰 것이 이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주님이 옳고, 나는 틀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나는 주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자가 아니고, 주님이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셔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가 중심이고, 나는 그 발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었던 것이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크다!
선민 사상으로 모든 민족보다 뛰어나다가 생각하고, 다른 민족들은 무시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비판하시고, 책망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반면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배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족 우월주의에 대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마태복음 15장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내용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한 것이다.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려움에 빠진 가나안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어조가 매우 거칠고,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기 싫으시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셔도 될텐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우리 안에 생길 수 있다. 사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인 명성도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할 말씀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26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가나안 여인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것도 큰 믿음. 무엇이 큰 믿음인가? 여인의 대답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여인이 이렇게 말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이 옳으시다. 주님이 항상 옳으시다.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든지 주님이 옳으시다. 이것이 믿음의 첫 단계이다. 그 다음 단계는 나의 모습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비굴한 모습은 아니지만, 주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내 삶의 문제는 해결 받지 못한다는 절심함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자녀의 떡은 먹지 못하더라도, 낮아지고 낮아진 나의 모습으로 주님이 주시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자세. 그 자세를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믿음이 크다? 는 우리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크다고 말할 때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을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 따지듯히 해서, 자녀로서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모습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은 클 지 모르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은 큰 것이 이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주님이 옳고, 나는 틀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나는 주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자가 아니고, 주님이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셔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가 중심이고, 나는 그 발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었던 것이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