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집에서 물고기를 몇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베타 피쉬(Betta fish) 한 마리를 샀습니다.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이 물고기의 치명적인 약점은 너무 공격적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동료들도 공격해서, 혼자 살아야 하는 어쩌면 불쌍한 물고기 입니다. 예전에 베타 피쉬를 키워본 적이 있는데요. 오래 산다는 물고기가 빨리 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잘 키워보겠다며 한 마리를 구입했더랬습니다. 하루는 물고기가 물 속에 넣어두었던 나무에 기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물고기가 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나무 사이에 서 잠을 자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내 딸이 물고기가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균형도 못 잡고 몸은 뒤틀어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물고기를 보면서, ‘죽을려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 때문에 그런가 해서 물도 갈아줘 봤지만, 물고기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추워서 그런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히터를 켜 줬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상한 몸짓을 하던 물고기가 조금씩 활발해졌다는 것입니다. 나중에서야 베타 피쉬는 열대 지역에 사는 물고기라, 물의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물고기용 히터가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고, 지금은 어항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항의 온도를 높이니까, 베타 피쉬의 몸은 펴지고, 색깔은 더 화려해지고, 움직임도 훨씬 빨라졌습니다. 몸의 균형도 맞았고요. 예전에는 먹을 것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지금은 사람만 나타나면 밥 달라고 합니다. 이런 베타 피쉬를 보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지식이 뭔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대로된 지식은 사람도 살리고, 동물도 살릴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제가 베타 피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
그리고 생각난 말씀이 호세아 4장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민족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 오래 다녔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라고 말입니다. 호세아서를 더 읽어보면,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하면 하나님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제사장 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을 것 같은데, 주님의 평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현대 교회는 호세아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방대하기까지 합니다. 성경도 다양한 버젼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현대 교회를 향해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아마도 주님은 현대 교회를 향해서도, 호세아 말씀과 같이 말씀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라고 말입니다.
쉽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호세아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대답 대신에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주님이 율법학자에게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으시나요?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이렇게 읽으십니다. 우리 마음에 와 닿는 것만 읽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이야기, 우리를 축복하시는 이야기를 주로 읽습니다. 감동이 오면 형광펜으로 표시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으시거나 메모를 남기시는 분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런 습관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읽고 싶은 내용만 읽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만 읽고, 나머지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부분, 우리가 원하는 부분만을 우리는 주목합니다. 우리 귀에 듣기 싫은 소리, 우리 마음에 찔리는 이야기, 마음에 부담되는 이야기들은 될 수 있으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라는 질문은 성경을 통해 어떤 지식을 얻었느냐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으시나요?’ 그리고 성경을 통해 어떤 지식을 얻으셨나요?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생과 관련된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4장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실제로 그들의 삶을 보면, 그들이 섬겼던 신은 나무 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몸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지만, 그 지식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식이 없다고 하신 것은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과 전혀 상관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고,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망했습니다.
율법학자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절)”
율법학자의 대답은 옳은 것입니다. 정답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올바르다고 주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성경을 어떻게 읽으세요. 여러분은 주님의 질문에 정답을 이야기하실 수 있으신가요? 옳은 주장이신가요? 똑 바른 소리인가요? 옳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올바르게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식은 행함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 행하지 않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아는 것’으로 부터 ‘행하는 것’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으면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은 알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그 지식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삶은 나무를 향해 절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물고기가 따뜻한 물에서 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물고기를 차가운 물에다 넣어 놓고, ‘ 물고기야, 너는 할 수 있어 극복해야 돼, 인내하고 단련하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라고 했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데 그것과 반대로 하는 것은 어쩌면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열대어를 아주 차가운 물에 넣으면 금방 죽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고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살면 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은 우리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칭찬에 신이 좀 난 것 같아요. 29절에 보면, “그 사람이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강도 만난 한 사람과 그를 도와준 사람이야기 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후에 예수님이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상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라고 율법학자가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진리를 알았으면,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주님은 ‘성경을 읽고 깨달은 것은 행하는 것’이 지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또한 신명기 4장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신 4:1)”
신 4: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은 행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지식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함을 보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옳은 지식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행하려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몸이 그 지식을 알게 될 때까지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주님의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씀은 결국 믿음은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공동체에, 우리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